새벽 2시, 헤세를 만나다
shffo10 2018.10.20 11:08:48
새벽 2시, 헤세를 만나다 / 김정한
가을이 문턱 가까이서 춤추는 새벽 2시, 혼자 깨어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시를 읽었어요. 헤세의 시는 내 생의 여정과도 같아요. 헤세의 Allein(혼자 가는 길) 이 그래요. 서른 즈음부터 얼핏 설핏 읽다가 지금은 영원한 동반자처럼 자주 읽는 시가 되었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나이가 든 탓이겠죠. 헤세의 시에서도 나와 있듯 누구나 첫걸음을 혼자서 떼고 나면 다음 걸음부터는 수월해지죠.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먼 길을 홀로 견디며 가잖아요. 물론 가다가 다치기도 하고 두려워 멈추어 서서 있기도 하고 죽을 만큼 힘들어 숨어 울 곳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많이 울기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아무 일 없듯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허허 웃으며 아침을 맞죠.
이제 삶의 중턱,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까 보이네요. 세상도 보이고, 가족도 보이고, 이웃도 보이고 친구도 보이네요. 다 내려놓으니 보이게 되고 보이는 모두가 이제는 애틋해요. 사소하지만 나를 섭섭하게 했거나 힘들게 했던 일까지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죠. 시인으로 살면서 헤세의 작품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작품 속의 주인공의 여정이 과 나와 너무 비슷하다는 거예요. 헤세는 불행한 일들을 경험했어요. 아들과 아내의 질병, 그리고 이혼, 또 전쟁을 통해 인생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고뇌했죠. 그의 글은 짧고 단아한 행간 속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적 교훈이 있거든요.
그의 시 '혼자 가는 길'에도 나와 있지만 누구든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가 왠지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요. 첫걸음도 혼자, 마지막 한 걸음도 혼자 이어야 하잖아요. 혼자서 왔다가 혼자서 가는 것이 인생이니까요. 생이라는 것이 중요한 결정은 혼자서 해야 하고,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사실도 때로는 마음속에만 담아두어야 하잖아요. 가족에게도 숨길 수밖에 없는 비밀이 있고 친구들과 나누지 못할 어려운 상황이 더러는 있잖아요.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고독한 것이 인간인 것 같아요. 아무리 고독이 쓰나미가 되어 덮쳐도 내 안의 순수한 '나'라는 방향키가 있기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신을 차리게 되죠. 고독을 통해 위기를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 혼란의 파도가 가라앉고 나면 한 단계 성숙해져 반듯한 통찰력을 갖게 되죠.
어떤 생이든 고독은 숙명인 것 같아요. 물론 더불어 부대끼면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독하고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며 돕는지도 몰아요. 고독은 스스로 감당하는 지능과 통찰력이 있기에 버거워도 견디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스스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에요. 한 걸음이든 두 걸음이든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거죠. 그래서 관계 속에 혼돈, 번민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스스로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 외로움을 홀로 극복해야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어요.
나무가 서로 같이 하면서도 마주 쳐다보지 않으며, 철로가 같은 방향을 달리면서도 서로 만나지 않듯 알고 보면 고독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고독하기에 존귀한 존재이고요. 그럼에도 덜 고독하려면 인간관계에 있어 인격의 강과 존중의 다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역할을 사람이 하기도 하지만 노래나 책, 영화가 대신하기도 하죠. 특히 시는 맹목적인 삶에 빠진 이에게 은밀하게 혼자라는 힌트를 주죠. 사랑의 맹세, 축복과 응원, 위로의 날개 같은 것들이 함께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날다가 추락한다는 거죠. 무엇을 하든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가는 빠른 걸음보다는 여백을 가지고 느리게 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취하며 가자는 것이에요. 가끔 지치고 힘들 때나 생의 방향키를 잃었을 때 한 편의 노래나 시를 읽으면서요. 아마도 '멈춤'과 '쉼'에 있어 선명한 위로를 안겨줄 테니까요. 물론 '멈춤'과 '쉼'이 더한 방랑과 혼란을 안겨주어 영원한 안주 속에 빠지게 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들 속에서 '진실'을 발견한다면 충분히 그로부터 힘을 얻어 당당하게 앞을 향해 상쾌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가 있겠죠.
세상은 여전히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거리를 서성이는 뙤약볕은 무섭지만 곧 온몸을 휘감는 서늘한 기운이 가을을 물어다 놓을 거예요. 폭염을 견딘 곡식과 과일, 그것을 잘 가꾼 농부의 일손이 고맙기에 수확은 위대한 것이죠. 곧 여름의 잔해는 파랗게 질려 슬금슬금 떠날 것이고 안간힘을 다해 울어대던 매미도 흙먼지로 돌아갈 것이에요.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아래도 흘러내리듯이. 모든 것은 떠나가죠.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곧 허무의 시작이잖아요. 생의 완벽이 열매로 완성될 때 또 침몰이 시작되는 것처럼요. 오늘따라 반백년 전에 죽은 헤세의 목소리가 왜 이토록 간곡하게 들릴까요?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존재하는 근원은 'Allein( 혼자 가는 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가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요. 나에게 무심한 눈길을 거두고 온화한 시선을 주라고요. 그리하여 멈춰버린 모든 것을 살게 하여 다시 춤추게 하라고요. 그래서 아무런 걱정이 찾아들 틈 없이 오래도록 유쾌해지라고요.
김정한 신작 산문집 [나는 아직 괜찮습니다 p242-2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