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으로 간다.

휴일날 아침이라 차속이 널널하고 여유롭다.

자리에 앉아 문고판 ‘거울속의 너’ 란 김원우의 단편을 읽는다.

나는 지하철을 타면 항시 문고판 책을 읽는데 이 책은 손에 잡은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지하철 탈 때만 조금씩 읽다보니 아직도 손에 들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숙녀들이나 아가씨들을 쳐다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백발의 노인이 노망을 했나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름다움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이다.

서울대입구에서 시청까지가 꽤 먼 거리다 보니 조금 남아있던 페이지가 시청에 도착할때쯤 해서 다 읽어버렸다. 책이 단편이든 장편이든 책 한 권을 다 읽는다는 것은 매우 기분좋고 뿌듯한 일이다. 옛날에는 책을 한 권 읽고나면 책거리를 한다고 떡도 해 먹고 소박한 잔치도 했다고 하는데. 나는 책을 살 때 책 맨 뒤 속지에 그 날짜를 기록해 두고 또 그 책을 다 읽은 날도 꼭 기록해 둔다. 그래야 그 책을 언제 샀으며 또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수가 있고 또 읽었으면 그 내용을 대강 기억해 낼 수가 있다. 그리고 읽은 날짜옆에 간단히 싸인을 하는데 그때의 기분도 무시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아침 9시쯤 서울대입구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시청에 내리니 10시 10분전이니 1시간이 조금 못 걸리는 것 같다. 덕수궁쪽이 몇 번 출구인가 확인해 보니 12번 출구이다. 시청역은 지하공간이 엄청 넓다. 12번 출구를 찾아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파란 하늘에 밝은 태양이 빛나고 산들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게 전형적인 가을 날씨라 기분이 산듯하고 날아갈 듯 가볍다.

결혼식이 덕수궁길 끄트머리에 있는 천주교 프란치스코회관에서 11시에 있으니 1시간 가량 여유가 있어 지금부터 모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 어린 시절 소풍 갈 때처럼 들뜬 기분이 되어 길가 돌벤치에 앉아 조그만 수첩을 꺼내어 이 느낌을 글로 옮겨 보기도 하는데

어디선가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노래가 흘러나온다.

대학시절 서울 운동장에서 고연전 야구시합이 벌어졌을 때 고대출신인 김상희가 응원단 앞에 나와 이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아득한데 ....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 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나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텅 빈 늙은이의 가슴에 단풍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