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5시반에 일어나 신문을 뒤적뒤적 하다가 신통한 소식도 없고 날마다 보는 지겨운 이야기뿐이니 신문을 덮고 바깥 날씨가 어떤지 모르니 두툼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배낭에 물통을 5개 집어넣고 집을 나선다. 어젯밤에 보니 냉장고에 약수가 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오늘 새벽 일찍이 약수를 떠다 놓으려고 생각을 했었다.

바깥을 나오니 날씨는 포근하고 땅이 촉촉한 걸 보니 간밤에 비가 살짝 뿌린 것 같다. 시간이 6시니 아직 날이 어둡다. 거기에 비온 후라 자욱한 물안개가 끼어 있다. 새벽산길에 외등들이 쭉 켜있고 새벽의 상큼한 냄새를 맡으며 산길을 걷는 것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아내가 가끔 새벽미사를 다녀보라고 하는데 성당까지 가고오고 하는 일은 걷기로써는 참 좋은데 막상 성당에 앉아 있으면 강론을 듣는 것이 이상하게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도 아내의 말마따나 내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현충원 상도동쪽 문 앞에서는 좌로 갈 것이냐 우로 갈것이냐가 항시 머뭇거리는 갈림길이다. 오늘은 아직 어둑하고 하니 가까운 우쪽으로 방향을 튼다. 왼쪽 약수터는 오른쪽 약수터보다 조금 더 거리가 있다. 현충원 안 지장사옆 약수터는 새벽이라 물깃는 사람이 아침에 많이 몰려 있을지도 모르니 새벽에는 피한다. 가다보니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린다 . 가만히 들어보니 아침 기체조(氣體操)하는 무리다. 일주에 아마도 나흘을 30.40명이 모여서 기체조를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시작한 지가 10년이 넘은 것 같다.

기체조팀을 지나서 약수터에 도착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맨손체조를 한다. 체조를 하고 나면 기분이 가뿐하다. 상쾌한 공기에 새벽체조는 몸속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언제나 좋다. 체조후에 약수를 받는다. 다섯통을 다 받아서 배낭속에 넣고 어깨에 짊어지고 일어선다. 지나는 길옆 체련관에서는 일찍부터 아령 역기등 기구를 가지고 운동을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오면서 한강쪽을 바라보니 빨간 자동차 불빛들이 줄을 지어 동작대교쪽으로 움직이는 모양이 아름답다. 드문드문 오고가는 새벽산책객들도 활기찬 모습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산책을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안되는 것이 저녁에 잠을 늦게 자다보니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배낭을 매고 터벅터벅 산길을 걷다보니 오래전에 읽었던 이청준의 ‘눈길’이란 단편소설이 생각난다.‘눈길’이란 소설을 다시 한번 들춰 읽어보니 그 내용이

어린시절 가난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을 애써 외면해 오던 주인공이 아내와 함께 고향을 찾는다.어머니가 집을 고치고 싶어하는 걸 알고 부담을 느껴 서울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아내를 통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표현한 작품이다.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차부까지 바래다 주고 혼자 돌아가시던 그때의 일.

“눈길을 혼자 걸어가다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하고 며느리에게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눈덮힌 지붕 오래된 옷궤 눈길등을 통하여 세 사람간의 갈등 화해의 과정을 긴장감있게 표현해 놓았다.

나는 이 ‘눈길’이란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서 어릴때의 생각이 아련히 떠 오른다.

나는 어릴 때 연년생으로 남동생이 태어났으므로 엄마는 동생에게 빼앗겨 버리고 나는 할머니손에 자라다시피 했다. 할머니는 집 뒷산에 있는 복수사라는 절을 친정집처럼 다녔는데 사실은 친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절의 주지스님이 할머니의 친정어머니였기 때문이다.그 노할머니는 대구로 시집을 갔다가 딸만 둘을 낳고 아들을 못 낳는다고 시집에서 쫒겨나다시피 하여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스님이 나를 보고 하야 하야 하고 무척 귀여워하시고 가끔 주머니에 과자도 사서 넣어주시고 했는데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절을 따라다닐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새하얀 눈이 덮힌 새벽산길을 가기도 하고 어떤때는 야밤중에 상여집 옆을 지날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머리가 쭈빗쭈빗 서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을 외우면서 가시는데 그러면 무서움이 죄다 사라진다고 하셨다.

오늘 새벽 집뒤 산길을 걸으면서 이청준의 ‘눈길’이란 작품이 생각나고 또 ‘눈길’때문에 어릴때의 그때가 다시 추억속에 떠 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