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포도주는 묵을수록 좋은 거라지요.
정이 가득한 물건들도 그렇습니다.
그다지 소용에 닿지 않아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구석 쌓아둔 물건들을 어루만지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건도 이럴진대
사람의 정은 어찌 쉽게 끊을 수 있겠는가…하는.

어쩌다 그다지 귀하지 않은 물건 하나를
흘리고 다시 찾을 수 없었을 때
아깝고 아쉽다며 마음을 쓰다가도
금방 고개 내저으며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을 놓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사람이 아닌 물건을 잃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라구요.

아들이 소년시절에 읽던 만화책들이
아직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습니다.
지난 번 휴가 나왔을 때
이제 그만 정리하지 그러냐고 했더니
웃으며 중얼거리는 말이 그래요.
정 때문에…라구요.

낡은 만화책도 그 놈의 정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니
정이라는 실타래로 엉킨
사람들 사이는 더욱 그렇지요.
정 때문에 손 놓고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이
때로는 안타깝고 서글프기도 하지만
정 때문에, 그 놈의 정 때문에
물때처럼 마음에 낀 미운 정 고운 정으로
맑았다 흐렸다 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정 때문에 버릴 수 없는 물건들과, 정 때문에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인연들 속에서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하여 고운 정 미운 정 끌어안고
습관처럼 저물어가겠지요. 세월은
쌓인 정을 잔뜩 등에 지고도 유유히 흐르고 또 흘러갑니다.
어쩌면 저렇게,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가는 걸까요.

출처 : http://www.positive.co.kr/home/contents/board/list.asp?num=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