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내 고향에는 ‘희망리’라는 마을이 있다. 읍내 중심가에서 조금 비껴 앉은 양지바른 동네다．

어느 날,라디오방송 음악프로 진행자가 그곳에서 온 엽서를 소개하며 “희망리. 참 예쁜 마을 이름이지요. 이곳에 사는 분들은 항상 희망을 갖고 사니 얼마나 행복할까요”라고 한다．

희망리에 살았던 고향 친구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하니,친구는 쓴웃음을 짓는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아픈 기억만 있어. 이 집 저 집 싸우는 소리,술 취한 소리,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 아무 희망이 없어 희망을 가져야해서 지은 이름이겠지”

그래도 나는 희망리로 향하는 서편 신작로와 친구네 집 대문이 보이는 좁은 골목길이 정겹고 따뜻하게 기억된다. 내가 친구에게 가는 때는 대부분 땅거미가 지는 저녁 무렵이어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 굴뚝에서는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들창에는 하나 둘씩 불이 켜진다. 동네에 들어서면 개 짓는 소리와 낮은 칼도마 소리,음식 냄새…. 친구가 추억하는 대로 그곳이 정말 희망 없이 가난한 동네였다면 음식들은 순강원도 식의 토속음식이었을 것이고,토속적일수록 음식 냄새는 강렬하기에 지금껏 음식 냄새 속에서 그곳이 더 따뜻하게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보도될 때 매우 인상적인 광경이 있었다. 전쟁의 포화 속,깡마른 노인과 병든 아이들이 신음하는 피란민의 천막에서도 사막의 꽃처럼 아기는 태어났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도 부부는 아기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신께 감사드린다. 민족이나 전쟁과 같은 거창한 명분도 아랑곳없고,불행한 현실도 가족이라는 신성한 묶임 앞에서는 보잘것없이 여겨지던 순간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태어난 그곳 아기들의 이름도 희망리와 같이 그들의 염원을 담아 ‘평화’와 ‘사랑’ ‘위안’의 뜻을 지닌 말로 짓는다고 했다．

화가 이중섭은 인간적 고독과 예술적 고통을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에 담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아이들과 놀던 제주도 바닷가의 꽃게 그림,복숭아나무와 동자들. 꽃으로 장식한 황소의 등에 이삿짐을 싣고 소풍을 떠나듯 행복하게 웃는 ‘길 떠나는 가족’….

70년대 이전 내 고향의 희망리는 가난 때문에 희망 없는 마을이었다고 하나,나에게는 따뜻한 곳으로 기억된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불을 밝히고 매일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밥상문화가 식탁문화로 변하고,‘능력=독신,이혼’의 분위기에서,희망을 잃게 하던 물질적 가난 대신 스스로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정신적 가난이 깊어지고 있다. 가족이 모여 앉는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렵기에 밤이 되어도 불 꺼진 집이 많고,휘황한 네온의 거리에는 사람과 음식 냄새가 뒤범벅된 채 어지럽게 넘쳐난다．

3쌍 중 1쌍 꼴인 세계 3위의 이혼율. 함께 있어서 괴로운 것과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 중 고통의 경중은 헤아릴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스산하게 바람부는 날,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우리 집’뿐이다．

- 이옥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