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에서 내뿜던 독기를 덜어내고, 한층 가벼워진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함께 촬영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연신 “여자가 됐네”하고 감탄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던 묘한 미소를 띠고, 김슬기가 왔다.

20대 여배우 중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만 하는 게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도 경험했고, 를 통해서 정통 코미디 무대에도 섰다.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다양한 장르의 연기를 하고 싶었다. 연기, 노래, 춤 모두 좋아했다. 뮤지컬을 하면 그걸 다 할 수 있겠더라. 그리고 공연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방송도 하고 싶었다. 매체마다 다른 특성이 있는데 그 모든 걸 경험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였다.

장르를 넘나드는데 어려움은 없나? 영화를 주로 찍는 배우들은 때로 드라마 현장을 힘들어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재미있다. 각각의 장점이 다 있으니까. 이게 질릴 때 저걸 하고, 저거에 치이면 다시 이걸 하고. 물론 그게 완전히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드라마 쪽대본에 적응하는 일은 힘들지만, 드라마만의 장점이 분명히 있다. 피드백이 바로 되고 연기할 때 자유로운 부분이 있다. 영화 연기는 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해서 완벽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어서 조금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영화는 전체의 미학이 있다. 여유롭게 촬영할 수도 있고.

굉장히 다양한 연기를 해왔음에도 ‘김슬기’하면 감초 배우, 코미디 배우라고 느끼는 대중이 많다. 그런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는지. 에서 하차 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는다. 감초 배우는 정말 자신의 역을 잘 살려야만 될 수 있는 거니까. 나중에 김슬기의 다른 면을 보여줄 기회가 와서 그때 대중이 새로운 면을 보고 놀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라고 생각한다. 한정된 상황에서 해온 연기였지만, 분명히 다르게 연기해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주어진 걸 잘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4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쌓아온 필모그래피라고 보기엔 놀라울 정도로 탄탄하다. 내가 운이 좋다. 하는 것마다 잘 됐다. <수상한 그녀>와 <국제시장>을 더하면 2천만이 넘는다. 복덩이가 아닌가?(웃음)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시기가 잘 맞아서 하게 된 작품들이 다 좋은 결과를 낳았다. 고마울 뿐이다. 장르를 오가며 연기를 하겠다는 건 원래 꿈꾸고 계획했던 거였고, 그 일부를 완성할 수 있어서 기쁘다.

20대 초반을 온전히 배우로 살았고, 이제 중반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지금처럼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랑 받고 싶다. 천만 배우도 되어봤고, 상도 타봤기 때문에 큰 욕심이 없다.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물론 지금도 배우는 독기를 품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더 나은 배우가 되고 싶고 더 많이 알려지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반드시 이뤄야만 한다는 마음은 없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많은 괴로움이 따르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내 안에서 행복을 찾아가면서 꾸준히 연기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배우가 되고 싶었고, 그걸로 다 이뤘다. 지금처럼 소소하고 행복하게, 끊이지 않고 연기할 수 있는 정도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