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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정재

주연 : 이정재, 정우성, 전혜진, 허성태, 고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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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와 정우성의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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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박헌수 감독의 [구미호]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 영화로는 획기적인 특수효과 기술로 한국 판타지 영화의 한 획을 그을 것이라며 언론에서 대서특필했었다. 특히 1993년 방영되었던 <엄마의 바다>에서 톡톡 튀는 매력을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던 고소영의 영화 데뷔작이었기에 나 역시 쥐꼬리만한 용돈을 긁어모아 혼자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구미호]는 어색한 특수효과와 단선적인 내용으로 내 기대에 한참 못 미쳤는데, 그중에서도 소영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신인 배우 정우성의 발연기는 도저히 두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아무리 얼굴이 잘 생겼어도 저렇게 연기 못하는 배우가 어떻게 주연을 맡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1995년 전 국민을 TV 앞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게 만든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모래시계>이다. 최민수와 박상원의 뜨거운 우정과 엇갈린 운명,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최민수와 고현정의 슬픈 사랑까지... <모래시계>는 1992년 방영되었던 <여명의 눈동자>와 더불어 내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레전드 드라마였다. 하지만 <모래시계>에서도 옥에 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윤혜린(고현정)의 보디가드인 백재희를 연기한 이정재였다. 당시 여성 시청자들은 이정재의 잘생긴 외모만으로도 환호했지만 내 눈엔 연기를 못해도 너무 못하는, 그냥 얼굴만 잘 생긴 그저 그런 배우일 뿐이었다.

배우에게 외모는 중요하다. 관객에게 캐릭터의 매력을 어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배우의 외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기력이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그 배우는 결코 오래 갈 수가 없다. 나는 정우성과 이정재가 외모로 잠깐 뜨다가 가라앉을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999년에 개봉한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단 몇 년 만에 정우성과 이정재는 얼굴만 잘 생긴 배우에서 연기까지 잘 하는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미남 배우로 우뚝 섰다. 그리고 이제 이 두 배우는 또다시 한 단계 진화를 하려 한다.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인 [헌트]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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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순한 첩보 스릴러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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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 시즌 한국 영화 빅4 중 마지막 영화인 [헌트]가 개봉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2년 6개월간 여행을 가지 못했던 나는 오랜만에 여름휴가를 가기 위해 계획을 짰고 여름휴가 가기 하루 전날 혼자 [헌트]를 보며 본격적인 휴가 분위기를 내려고 계획했다. 사실 나는 [헌트]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첩보 액션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다. 조직 내 스파이 색출이라는 내용은 2013년 개봉했던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를 연상시켰기에, [헌트]가 [신세계] 분위기에 코로나19 시국에 어렵게 개봉했던 정우성 주연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과 이정재 주연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서스펜스를 적당히 섞은 듯한 누아르 영화일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헌트]는 1980년대 제5공화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 2020년에 개봉한 우민호 감독, 이병헌 주연의 [남산의 부장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남산의 부장들]이 박정희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고, [헌트]는 전두환 암살이라는 가상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다시 말해 [헌트]는 첩보 스릴러, 혹은 누아르 영화라기보다는 정치 스릴러에 더 가깝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영화를 가볍게 즐기려던 내 계획은 [헌트]가 시작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물론 내가 정치 스릴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군사 독재 시절을 소재로 한 영화는 아무래도 가볍게 즐길 수가 없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원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던 사건은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그들은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고, 온갖 잔혹한 고문으로 거짓을 진실로 탈바꿈시켰다. 어찌 나의 아버지 세대가 겪었을 그 참혹한 폭력을 가볍게 즐길 수가 있단 말인가.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나는 느슨했던 자세를 고쳐 잡고 진중하게 [헌트]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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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절을 관통하는 서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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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 1983년 워싱턴 D.C.이다. 안기부 13년 차 해외팀 팀장 박평호(이정재)와 안기부 4개월 차 국내팀 팀장 김정도(정우성)는 대통령 독재를 반대하는 현지 집회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한다. 그러던 중 CIA가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저격수의 존재를 밝히며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대통령 암살을 저지하려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김정도가 저격수를 사살하면서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 첫 장면을 통해 [헌트]는 박평호와 김정도의 날카로운 신경전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베테랑 안기부 요원인 박평호와 군부 출신 낙하산 김정도. 그들은 안기부 내에서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은밀한 전쟁을 벌인다.

박평호와 김정도의 대립은 안기부 내에 북한 첩자인 동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격해진다. 안기부의 일급비밀이 북한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상황. 정황상 동림의 정체는 안기부 고위 간부임이 분명하다. 박평호는 김정도를 의심하고, 김정도는 박평호를 의심한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을 동림으로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동림이라는 누명을 쓰고 제거될 수도 있으니...

박평호는 김정도가 군납업체 목성사 대표 최규상(유재명)과 유착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최규상을 빼돌려 잔혹한 고문을 하며 김정도의 뒤를 캔다. 김정도 역시 기만 있지 않는다. 박평호가 보호하고 있는 대석대학교 학생 조유정(고윤정)이 조총련계 조선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조유정을 북한 공작원으로 박평호를 동림으로 조작하려 한다. 누가 먼저 조작에 성공하느냐가 관건. 이렇게 박평호과 김정도는 살기 위해 서로를 향한 날선 거짓 공작을 벌인다. [헌트]의 서스펜스는 바로 이러한 거짓 공작에서 비롯된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 그렇기에 [헌트]의 긴장감은 더욱 나의 심장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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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전에서 의외의 재미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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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헌트]는 정치 스릴러 영화이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가 서로를 의심했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 상대방이 동림이라는 거짓 공작을 벌인다. 그 사이에 잔혹한 고문 장면도 나오고, 서로를 감청하며 치밀한 작전을 세운다. 여러모로 [남산의 부장들]이 연상된다. 여기에 1983년 전투기를 몰고 월남한 북한 공군 장교 이웅평을 연상시키는 리 중좌(황정민)의 임팩트 있는 등장으로 영화의 현실감을 높였다. 하지만 [헌트]는 정치 스릴러에 머물지 않고 이를 뛰어넘는 오락 영화적인 재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도심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이다.

영화 초반 워싱턴 D.C.에서 벌어지는 저격수와의 총격전은 시작에 불과하다. 영화 중반 북한 핵 개발 사업 책임자인 고위 간부 표동호(정재성) 망명을 위해 일본 도쿄 도심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은 워싱턴 D.C. 장면보다 한층 스케일이 커졌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작에 불과하다. [헌트]의 하이라이트는 태국 방콕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총격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이 장면은 어마 무시했다. 그 와중에 이정재와 정우성의 케미(?)까지 돋보인다. 왜 이정재 감독이 정우성을 캐스팅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설득했는지 이해가 된다. 대규모 총격전에 폭탄 폭발까지 난장판인 현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김정도가 '박평호'를 울부짖는 장면은 뭐랄까, 묘하게 섹시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 때문에 워싱턴 D.C. 장면은 여의도에서, 도쿄 도심 총격전은 부산에서, 방콕에서는 대규모 총격전은 강원도 고성에서 찍었다고 한다. 해외 로케로 더욱 생생하게 현지 느낌을 살렸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격전에서 전해지는 스펙터클한 재미가 상당하다. 그 덕분에 [헌트]는 정치 스릴러와 더불어 첩보 액션의 영화적 재미까지 두루 갖추었다. 신인 감독의 연출력이 이 정도라니... 과연 이정재의 충무로 짬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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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같으나 목적은 달랐다. (이후 스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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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헌트]에 결정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있는 오락 영화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헌트]는 '누가 동림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져 놓는다. 정황상 김정도가 동림일 확률이 높았다. 영화 초반 워싱턴 D.C.에서 김정도가 저격수를 가차 없이 사살하는 장면을 통해 대통령 암살을 모의한 사람이 김정도였음을 영화는 드러낸다. 하지만 박평호 역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동림인가?'가 아니었음이 영화 후반에 밝혀진다. '누가 동림인가?'라는 질문은 '누가 대통령을 죽이려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국민을 향해 실탄 사격을 지시한 대통령.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살인마를 죽이려는 시대적 사명 속에서 서로 대립하던 박평호와 김정도는 결국 손을 잡게 된다.

그렇다. 박평호와 김정도의 목표는 같았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 암살. 이를 위해 박평도는 북한 내 온건파와 손을 잡고 대통령을 암살한 이후 평화 통일을 계획했고, 김정도는 대통령 암살 후 새롭고 정의로운(?) 군사 정권을 세우려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대통령 암살이라는 목표는 같았지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목적은 달랐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평도는 대통령 암살 이후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알게 된다. 조국을 전쟁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지 않으려면 대통령 암살을 막아야만 하는 상황. 박평도는 지독한 시대의 아이러니에 마주하게 된다.

만약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만약 나라면?'이라는 생각에 빠지고는 한다. 그런 영화는 단순히 즐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깊은 여운을 안겨 준다. [헌트]가 그랬다. 전쟁을 막는 대신 살인마 대통령의 독재 정권이 나은 것일까? 아니면 살인마 대통령을 죽이고, 북한과 전면전을 펼치는 것이 나은 것일까?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박평호는 전자를 선택했고, 김정도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 선택의 갈림길 속에서 결국 박평도가 승리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승리일까? 조유정이 자신을 감시하는 북한 첩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평호는 그녀를 만나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살인마 대통령의 독재에 일조한 시대의 악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길 선택한 것은 아닐까?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는 그렇게 내게 짙은 여운을 안겨주고 끝을 낸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하고, 이제 연출까지. 도대체 이 남자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휴가를 하루 앞둔 어느 여름날, 나는 짙은 질투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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