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

누군가 내게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만 더 있어야 한다고 한다면 난 두말없이 내 남편 양기호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그의 뜨거웠던 사랑은 조금씩 덤덤해졌고, 나 또한 내 사랑을 가슴 한쪽에 묻어두고자 했다.

어느 날 일찍 퇴근한 남편은 큰 결심을 했는지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다.

“나 대학원 갈란다. 내가 공부해서 너 지켜줄게. 실력 있으면 어떤 놈이 감히 내 앞에서 너랑 너희 친정이랑 네 새끼를 무시하겠냐. 내가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쏴 줄 테니 나만 믿고 따라와. 애들이랑 부모님은 네가 잘 챙겨줘.”

굳은 결심을 한 남편은 코피를 터트려가며 공부에 열중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용기를 북돋워 주던 사람이었기에 난 그 사람이 반드시 박사 학위를 받을 거라 믿었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한의원을 종종 비우게 되니 어머님이 걱정하셨고, 나는 가족을 위해 여러모로 더욱 신경을 썼다. 공부 잘하는 큰딸을 비롯해 아이들이 더욱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고, 자폐아인 큰아들에게도 심리치료, 미술치료, 태권도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며 더 나아지기를 기도했다.

남편은 석사도 2년, 박사 학위도 2년 만에 취득했다. 아들이 박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신 어머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아픈 자식들을 포함해 애들 넷을 돌보며 뒷바라지한 큰며느리가 정말 수고 많았다고 아낌없이 나를 칭찬해주셨다.

이듬해에는 한 여성 환자가 허리가 아프다며 침을 한 번 맞고 갔는데, 며칠 후 아버지와 함께 한의원에 찾아와 그때 맞은 침 때문에 밤중에 응급실에 실려 갔었고, 결국 서울에 가서 허리 수술도 했다며 병원비를 내놓으라 했다.

남편은 차분하게 그 사람들에게 본인의 입장을 설명했다.

“나는 약침이나 봉침은 물론 뜸 치료도 안 하는 사람이고, 절대 먼저 환자들에게 한약도 권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양심적으로 또 원칙적으로 진료를 보고 있어요. 만약 침 한 번으로 허리를 상하게 했다는 증명 서류만 제시해 주시면 피해액을 보상하겠습니다.”

더는 대응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일단 조용히 돌아갔다.

남편은 ‘의사는 장사꾼이 아니다’라는 본인만의 원칙을 정말 고집스럽게도 지켜온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약초 공부를 많이 해서 약에 관해서는 다른 원장님들도 남편에게 묻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그는 약을 함부로 환자들에게 권하지 않았다.

남편에게서 비록 따뜻한 말투는 사라졌다 할지라도 내가 편안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건 여전했다. 큰아들을 데리고 서울 병원에 다녀오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올 때면 늘 시간 맞춰 공항이나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항상 운전기사를 자청했던 그는 내가 시장에만 가도 항상 데려다줬고, 백화점에 가면 너무 오랫동안 쇼핑하지 말라고 잔소리는 했어도 차에서 나름 잘 기다려줬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애정표현 대신 언제나 말없이 나를 챙겨주었다.

남편은 지역에서 명의로서의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어떤 분은 목욕탕서 넘어져서 119를 불렀는데 응급실에 가지 말고 양기호 한의원으로 가 달라면서 예전에 허리가 정말 아픈 적이 있었는데, 양기호 한의원에 기어서 들어갔다가 걸어서 나왔다는 경험담을 전했다고 했다.

한의대 이전에 전자공학도 전공했었지만, 그 사람은 전자 차트 대신에 늘 진료기록부에 직접 기록했다. 환자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조금 더 확실히 기억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2015년 설이 막 지났을 무렵, 남편은 자꾸만 살이 빠졌다. 몸 상태는 안 좋았지만 늘 환자들로 붐비는 한의원을 비울 수 없어 진료는 꾸준히 했다. 5월 초 갑자기 혈당이 더 높아지고 눈에 황달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 췌장CT와 MRI를 했고, 그 결과 췌장 두부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사랑했던 단 한 사람, 내가 원한 건 뭐든 들어줬던 그 사람이 암이라니. 하늘이 무너졌다. 오후 진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우는 나에게 그는 조용히 말했다.

“오늘만 울어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 때문에 네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나 없으면 네가 새끼들하고 살면서 힘든 일도 많을 텐데, 쓸데없는 감성팔이는 하지 말자. 나는 너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앞으로 나 치료받는 동안 부부보다는 의사와 간호사로 살자. 나 혈당 관리도 잘해야 하고 신경 쓸 일 많을 테니 내 오더 잘 받고 감정 관리 잘하자. 서울대병원으로 예약해라.”

그 누구보다도 놀라고 힘들었을 그 사람은 도리어 나를 위로해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오늘은 당신이 참 보고 싶은 날이네요 <보리> 저

아마존북스, 2020년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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