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란] - 가벼운 상업 영화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감독 : 니키 카로
주연 : 유역비, 공리, 요손 안, 제이슨 스콧 리
일단은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하여 올해 개봉 예정이었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대부분 개봉을 내년으로 미루었다. 올해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를 마음속으로 빽빽하게 적어뒀던 내 입장에서는 허무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 때문에 갈 곳도 놀 곳도 없는데, 봐야 할 영화마저 없으니 그야말로 앞이 깜깜할 지경이다. 그래도 모든 영화가 개봉을 내년으로 미룬 것은 아니다. 지난 8월 26일 개봉하여 현재까지 누적관객 168만 명을 동원한 [테넷]의 경우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개봉 강행을 밀어붙인 덕분에 올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편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개봉했다. 바로 디즈니 라이브 액션 신작 [뮬란]이다.
[뮬란]도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뮬란]은 원래 북미에서 3월에 개봉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하여 4차례나 개봉이 연기되었고, 결국 북미 개봉을 포기하고 대신 OTT 서비스인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되었다. 제작비가 2억 달러가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인데 극장 개봉을 포기하다니, 디즈니로서는 아마 피눈물을 흘리며 내린 결정일 것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이다. 국내에선 아직 디즈니 플러스가 서비스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국내 개봉이 무산된다면 언제 [뮬란]을 보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1998년 국내 개봉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을 재미있게 봤기에 실사화된 [뮬란]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결국 [뮬란]이 9월 17일 국내 개봉을 확정 짓자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했다. 사실 [뮬란]은 개봉 전부터 정치적인 이슈로 인하여 보이콧 논란이 있었고, 개봉하고 나서는 영화가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동양 문화의 몰이해라며 혹평에 휩싸였다. 나 역시 [뮬란]을 보기 위해 아들과 함께 극장을 향하면서 그러한 논란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쩌겠는가. 일단은 [뮬란]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애니메이션 [뮬란]과는 얼마나 다른가?
2019년 4월, 아들과 함께 애니메이션 [뮬란]을 봤다. 요즘은 보기 드문 셀 애니메이션을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뮬란]은 1998년 개봉 당시 그리 만족스러운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아니다. 당시 디즈니는 [라이온 킹]으로 애니메이션 최초로 북미 흥행 3억 달러를 넘기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였지만 그 이후부터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포카혼타스], [노틀담의 꼽추], [헤라클레스]의 흥행 성적은 하향세를 기록했고, [뮬란]은 비록 북미 1억 달러의 흥행을 넘지 못한 [헤라클레스]보다 나은 성적을 올렸지만 여전히 [라이온 킹]으로 정점을 찍은 디즈니 입장에서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성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20년 만에 다시 본 애니메이션 [뮬란]은 오히려 1998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에디 머피의 입담으로 덧입혀진 무슈는 디즈니 특유의 코믹 캐릭터로 영화의 재미를 더해줬고, '뮬란'이 전사로써 성장하는 과정과 부대장인 샹(B.D. 웡)과의 로맨스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보기 힘든 디즈니표 셀 애니메이션은 다시 봐도 정겹더라. 아무리 3D 애니메이션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디즈니만큼은 셀 애니메이션을 고수했으면 했는데... 이렇게 추억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벌써 1년하고 5개월이 지나버렸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뮬란]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번에 개봉한 [뮬란]은 애니메이션과 비교해서 크게 두 가지가 바뀌었다. 우선 애니메이션 [뮬란]의 코믹 캐릭터 무슈, 행운을 부르는 귀뚜라미 복동이가 사라졌다. 대신 영화에서는 불사조가 '뮬란' 집안의 수호신으로 나온다. 당연히 불사조는 무슈처럼 코믹 캐릭터는 아니다. 그리고 빌런으로 마녀 시아니앙(공리)이 추가되었다. 시아니앙은 뛰어난 무술과 변신술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극강의 캐릭터이기에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렇게 애니메이션 [뮬란]과 비교해서 바뀐 두 가지는 영화를 함께 본 아들과 나에게 단점과 장점으로 구분되었다.
바뀐 것으로 인한 실망과 재미
토요일 밤, 한적한 극장에서 [뮬란]을 보고 나오는 길,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영화 어땠니?"라고 물었다. 대뜸 아들은 "용(무슈)이 안 나와서 실망했어요."라고 말한다. 아들의 관람평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영화에서 무슈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영화의 현실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영화에서 용이 나온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판타지 영화가 될 테니까. 문제는 영화의 현실성을 감안하기 위해 무슈 캐릭터를 없애 놓고 정작 영화에서는 마녀와 불사조를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판타지스러운 캐릭터를 새롭게 추가할 것이었다면 무슈가 나와도 상관이 없잖아요. 도대체 왜 무슈를 빼버렸는지 이해가 안 돼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최고 인기 캐릭터가 무슈였음을 감안한다면 아들의 말대로 도대체 왜 무슈를 빼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다.
세상 모든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것이 지상 목표인 나는 아들과는 달리 [뮬란]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내가 [뮬란]에 만족한 이유는 시아니앙 덕분이다. 시아니앙은 비록 빌런이지만 '뮬란'(유역비)과 은근히 닮았다. 시아니앙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마녀라며 동족에게 쫓겨나고 배척당한다. 그녀가 보리 칸(제이슨 스콧 리)과 손을 잡은 이유는 그가 대륙을 지배하면 자신도 인정을 받고 동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보리 칸은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할 뿐, 인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영화의 후반부에 보리 칸을 배신하는 이유이다. 결국 보리 칸도 자신을 쫓아내고 배척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뮬란'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이 들통나고 나서도 전우들은 그녀를 지지해 준다. 결국 시아니앙과 '뮬란'은 서로 비슷한 처지이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고, 못 받고의 차이로 인하여 히어로와 빌런으로 갈린다. 이는 [뮬란]이 가지고 있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데, 나는 시아니앙 덕분에 영화의 주제가 훨씬 입체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젊은 시절 내가 좋아했던 공리의 존재도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의외의 캐릭터는 홍위, 그리고 황제
애니메이션 [뮬란]이 남장을 하고 아버지 대신 전쟁에 참가한 '뮬란'이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과 부대장인 샹과의 로맨스가 주를 이루었다. 그렇기에 나는 영화 [뮬란]에서도 '뮬란'과 부대장 텅 용(견자단) 장군의 로맨스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했다. 솔직히 유역비와 견자단의 나이 차이가 꽤 나긴 하지만 그래도 영화에서 로맨스가 빠진다면 섭섭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영화에서 텅 용 장군의 역할은 최소화되었다. 그래도 견자단이 캐스팅되었기에 부대장 이상의 역할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굳이 견자단을 왜 캐스팅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텅 용의 활용도는 미비하다.
그 대신 '뮬란'과 로맨스를 펼치는 캐릭터는 '뮬란'의 훈련생 동기인 홍휘(요손 안)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놀랬던 것은 홍휘가 야윈 체격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뮬란'의 짝이라면 우락부락하고 잘 생긴 호남형 캐릭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홍휘는 그러한 내 예상에서 완벽하게 빗나갔다. 그리고 '뮬란'과 홍휘의 로맨스도 로맨스라고 부르기에 좀 부족한 감이 있다. 오히려 그들의 관계는 우정에 가깝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 '뮬란'의 로맨스를 좀 더 강화할 줄 알았는데, 영화는 오히려 '뮬란'이 전사로써 성장하는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 영화에 이연걸이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그게 왜 놀랄 일이야?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 영화에 이연걸이 나왔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연걸은 황제 역할을 맡았는데, 어쩐지 황제씩이나 되는 양반이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는 등 무예가 예사롭지 않긴 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의 이연걸과 [뮬란]에서의 황제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연걸이 언제 이렇게 늙었던가? 아니면 영화를 위해 분장을 과하게 한 것일까? 지금도 캐릭터 포스터를 보며 전혀 이연걸처럼 보이지 않는 황제의 모습에 놀라는 중이다.
가벼운 상업 영화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만약 나에게 애니메이션 [뮬란]과 영화 [뮬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재미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애니메이션 [뮬란]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뮬란]이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역비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공리가 연기한 시아니앙이라는 캐릭터도 영화에 잘 어울렸다. 그로 인하여 영화가 너무 판타지스러웠지만 뭐 그런들 어떠한가. 극장에서 즐기기에 알맞은 스케일과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재미가 있으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1시간 55분의 러닝타임을 즐기면 되는 것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나열해 보자. 일단 시아니앙은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임에 분명하지만 그녀의 변심은 너무 가볍게 그려졌다. 나는 이 영화가 '뮬란'과 시아니앙을 비슷한 비중으로 그림으로써 비슷한 처지인 두 캐릭터가 어떻게 서로 상반되게 변할 수밖에 없었는지 심층적으로 보여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뮬란'에 너무 집중한 탓에 시아니앙 캐릭터가 부실했고, 그래서 더욱더 시아니앙이 보리 칸을 배신하는 과정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황궁에서의 전투씬은 좀 더 스케일을 키웠어야 했다. 그래도 황제가 있는 황궁인데 황제의 호위 무사들이 너무 적더라. 신궁에서 황제와 '뮬란' 그리고 보리 칸의 마지막 결투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인데 2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 영화답지 않았다. 뭐 나의 아쉬움은 이 정도... 물론 이 영화를 두고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이라 욕하고, 정치적 이유로 보이콧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가벼운 상업 영화로 만들어진 [뮬란]에 그렇게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뭐 한순간 즐기는 것이 상업 영화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뮬란]은 내게 딱 그만큼의 수준의 영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