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며, 놓으며 살아가는 삶
놀며, 놓으며 살아가는 삶
2019년 여름, 폭염경보가 내린 가장 무더운 날씨에 사랑하는 아들과 단둘이 2박 3일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수에 살고 있는 아내의 친구가 서울에 2박 3일간 집에 머물게 되어 자리를 피해줄 겸 갑자기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아내와 아내의 친구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굳이 이런 날 한번 떠나보고 싶었다. 아들과 함께 이런 무지막지한 더위를 즐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가용으로 움직이면 편하겠지만, 이번은 배낭여행으로 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강원도까지 가기로 했다.
긴급재난문자를 보니 평균기온이 35도가 넘어가고, 최고기온이 41도 이상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분명 여행을 떠나기에 적당한 날씨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여행을 떠나면 안 되는 최악의 날씨였다. 그것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와 함께 걸어서 하는 여행은 더군다나 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한여름의 뜨거운 더위를 고스란히 느끼고 싶었다.
결국 이 무식한 여행은 시작되고 말았다. 미칠 듯한 무더위와 목이 타는 갈증 후에 찾아오는 ‘시원한 물 한 잔의 행복’, 그 보상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 굳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젊어서 사서 하는 고생’은 결국 내 삶에 약이 되어 돌아오며, 대부분 즐거움이 뒤따른다.
집 근처 터미널에서 출발해 버스와 지하철과 시외버스를 번갈아 타고 아들과 나는 강원도에 도착했다. 마침 휴가철이라 지하철도 버스도 피서객들로 인산인해였을 법한데, 폭염이 기승을 부린 탓인지 생각만큼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다. 한여름의 강원도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눈앞에 마주한 짙푸른 나무와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마지막 이동 수단인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아들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청청한 풍경을 감상했다.
집을 떠나온 지 5시간이 조금 안 되어 이윽고 목적지가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내린 버스정류장에서 숙소까지 아들과 나는 배낭을 하나씩 메고 사이좋게 길을 걸었다. 폭염경보라는 말에 걸맞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뜨거운 공기가 폐 깊숙이까지 들어왔다. 항상 길을 걸을 때는 나란히 걷거나 아들을 조금 앞세우고 걸으며, 아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페이스를 조절한다. 아이들과 함께 걸을 때는 한 발짝 앞서가는 것보다 동기부여를 해주며 뒤에서 격려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들이 점점 힘들어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어깨에 걸친 배낭도 천근만근일 테고, 무엇보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몹시 지쳐 보였다.
“아빠, 무거운데 어디까지 가야 돼?”
아들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살짝 웃어준 뒤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며는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차차차) 차차차.”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이상한 노래만 부르고 있으니, 아들은 나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들, 무거우면 ‘놓으면’ 되지. 이리 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들의 가방은 바로 나에게 건너왔다. 그냥 걸어가긴 지루하니까 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왜 우리가 젊어서 ‘노세 노세’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인생사 공수래공수거라고 했다. 적당히 소유를 했으면 베풀 줄도 알고 살아야 한다. 조금 천천히 노래를 불러보면 실컷 놀라는 뜻의 ‘노세(play : 놀다) 노세’가 아니라 ‘놓으세(put : 놓다) 놓으세’로 발음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어서부터 놀기만 하면 딱 거지가 되기 십상이니, 젊어서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다만 제대로 놀(play) 줄도 알아야 하고, 여행도 많이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결국 모든 화(火)는 욕심에서 비롯되니 말이다. 이제 다시 노래를 불러보면 앞으로는 이렇게 들릴 것이다. ‘놓으세 놓으세 젊어서 놓아. 늙어지면(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이 많아지고 욕심이 많아져서 놓기가 더 힘들어) 못 놓나니’.
이야기를 마친 뒤 아들을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무척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아들이 씨익 웃으며 나에게 한마디 건넸다.
“그래서 내가 아빠한테 놓았잖아. 내 가방. 난 어려서부터 집착과 욕심을 안 가지고 지금처럼 놓을 거야.”
“하하, 맞다. 누구 아들인지 훌륭하다!”
가끔 아이와 함께 평균을 넘어선 힘든 일을 경험해볼 때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 아들과 내가 느낀, 사소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삶에 있어 소중한 문명의 혜택이나 놓음의 미덕 그런 것 말이다. 앞으로 살아가며 무엇을 좀 더 놓아야 할지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