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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 그렇게 한 명의 용기가 세상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간다.
13  쭈니 2020.07.09 16:52:07
조회 287 댓글 0 신고

감독 : 제이 로치

주연 : 샤를리즈 테른, 니콜 키드먼, 마고 로비, 존 리스고

이 매력적인 조합을 어떻게 거부한단 말인가?

지난 2월 9일에 개최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낯선 영화 한 편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밤쉘]이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이후 [밤쉘]은 국내 개봉이 확정되며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라는 구구절절한 부제를 추가했다.) 유력한 후보작인 [조커]를 제치고 분장상은 수상한 [밤쉘]이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이유는 샤를리즈 테른, 니콜 키드먼, 마고 로비라는 어마 무시한 주연급 여배우 세 명이 동시에 출연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이런 캐스팅이 가능했을까? 곧장 영화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섰다. 알고 보니 [밤쉘]은 미국 미투 운동의 시초가 된 막강한 언론 권력자 로저 에일스의 성추행을 고발한 용기 있는 여성 앵커들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였다. 빵빵한 주연배우, 실화를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영화의 소재까지 나에게 [밤쉘]의 개봉을 기다릴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밤쉘]에 대한 나의 기다림은 코로나19 때문에 하염없이 길어졌다. 그래도 코로나19가 한참 심각하던 시기에 개봉하는 바람에 결국 극장에서 보지 못한 [주디]보다는 낫다. 어쩌면 차라리 개봉이 7월로 미뤄진 것이 나에겐 호재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코로나19 사태가 심각 단계이기는 하지만 방역수칙만 잘 지킨다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의 개봉 당일 나는 기대감을 안고 극장으로 찾았다.

일단 영화는 재미있었다.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른)를 비롯하여 폭스뉴스 회장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에게 번번이 반항을 하다가 결국 해고 통보를 받는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 그레천 칼슨의 팀원이었지만 야심을 품고 직접 로저에게 접근하는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까지. 영화는 빠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영화의 중심 캐릭터들을 관객에게 소개한다. 그리고는 결코 주저함 없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영화의 전개 속도가 워낙 빨라 관객으로 하여금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아카데미 분장상 수상 이유

영화의 시작은 메긴이 연다. 메긴은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이며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트럼프와 설전을 벌여 화제의 중심에 선다. 이 장면은 실제 토론회 장면이 사용되었는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화면에 등장하니 영화가 아닌 진짜 토론회를 보는 것만 같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메긴을 연기한 배우가 샤를리즈 테른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샤를리즈 테른을 워낙 좋아하기에 그녀의 연기를 보기 위해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본 나로서는 영화 초반 메긴을 연기한 배우가 샤를리즈 테른인가?라는 의심을 해야 했다.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의 분장이 뛰어났음을 알 수가 있다.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로 완벽하게 변한 샤를리즈 테른을 보며 20년 전 봤던 [디 아워스]가 떠올랐다. [디 아워스]는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와 1951년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빠져있는 중년 여성 로라(줄리안 무어), 그리고 2001년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 로라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사는 출판 편집자 클래리사(메릴 스트립)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 역시 니콜 키드먼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라는 어마 무시한 캐스팅이 화제가 되었던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완벽하게 버지니아 울프가 된 니콜 키드먼의 연기이다. 결국 니콜 키드먼은 [디 아워스]로 제75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만약 [디 아워스]에 니콜 키드먼이 나온다는 정보를 모르고 본다면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한 배우가 니콜 키드먼이라는 사실에 놀랄 정도로 그녀의 분장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해 아카데미 분장상은 [프라다]의 차지였다.)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도 마찬가지이다. 영화가 끝난 후 검색을 통해 실제 메긴 켈리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확실히 영화 속의 메긴 켈리와 닮았더라. 메긴 켈리 뿐만이 아니다. 실제 그레천 칼슨과 영화 속 그레천 칼슨도 놀랄 정도로 똑같다. 존 리스고가 연기한 로저 에일스는 또 어떤가. 영화 시작 전 자막을 통해 '자료 화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우들이 연기한 것이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밝혀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시작은 한 명의 작은 외침이었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트럼프와 설전을 벌인 메긴이 영화의 시작을 활짝 열었다면, 폭스뉴스의 최고 권력자 로저에게 해고를 당한 그레천은 영화를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는다. 사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로저를 성희롱으로 고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공화당 지지자이며 트럼프와 친분이 깊은 로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가 없다. 실제 메긴이 로저를 고소하자 로저는 그레천이 해고당한 앙심을 품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반격을 한다. 아주 오래전 로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추가 폭로가 있었지만 로저는 당당하다. 증거가 있으면 내놓아 보라는 거다. 그레천은 자신이 시작을 하면 폭스뉴스에서 로저에게 성희롱을 당한 누군가도 용기를 내서 동참할 것이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자 좌절한다.

솔직히 이해가 되었다. 다른 사건도 아닌 성희롱 사건은 진실이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겨주기 때문에 섣부르게 나설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긴은 고민에 빠진다. 이미 트럼프와의 설전으로 보수주의자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결국 트럼프와의 화해라는 안전한 선택을 했던 메긴은 과거 자신이 겪은 로저의 성희롱을 폭로해야 하는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녀의 팀원들은 메긴이 폭로를 하면 팀 모두 직장을 잃을 것이라며 반대한다. 유명 앵커인 메긴은 다른 방송국에서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테지만 자신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실제 메긴 켈리는 로저 에일스의 성희롱을 폭로한 후 2017년 폭스에서 NBC로 자리를 옮긴다.) 메긴 또한 자신이 성희롱 피해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긴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케일라와 같은 앵커를 꿈꾸는 여성들이 여전히 로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현실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메긴의 합류는 로저에게 기울어지던 승부의 추를 바꾸어 놓았고, 이에 맞춰 그레천이 로저의 성희롱이 담긴 녹취 파일을 공개하며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그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은 보수 언론의 제왕 로저 에일스는 그렇게 무너진다. 하지만 폭스뉴스가 피해자들에게 준 보상액보다 로저 등 가해자들이 폭스뉴스를 퇴사하며 받은 퇴직금이 더 많았다는 마지막 자막은 씁쓸함을 안겼다. 그것이 보수적인 미국 사회의 단면일지도...

이 영화가 2차 가해를 피하는 슬기로운 방법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 속 캐릭터 대부분이 실존 인물이고, 실제 사건을 근거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우려되기도 했다.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영화가 로저 에일스의 성희롱 행각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는 분명 자극적이고,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인 그레천 칼슨과 메긴 켈리에겐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그녀들의 상처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 절대로 피해야 할 최악의 선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슬기롭게 피해자들의 2차 가해를 피해 간다. 바로 가상의 캐릭터인 케일라 포스피실을 통해서이다. 케일라 포스피실은 야망을 위해 로저에게 접근하는 야심찬 여성이다. 케일라와의 첫 대면에서 로저는 케일라에게 성희롱을 시도한다. TV는 영상 매체라며 케일라의 몸매를 감사하더니 급기야 케일라에게 치마를 위로 올려보라고 청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로저의 요구는 점점 노골적이 되고, 결국 케일라의 팬티가 노출되자 치마를 위로 올리라는 로저의 성희롱은 멈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케일라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 성적 수치심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로저는 케일라에게 성공을 미끼로 더욱 노골적인 성접대를 요구한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이 장면이 없었다면 도대체 로저의 성희롱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관객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다. 결국 이 장면은 보수 언론 권력자로 포장된 로저의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존 인물을 이 장면에 배치시킬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2차 가해가 될 테니까. 그렇기에 케일라는 가상의 인물이고, 그레천이 시작했고, 메긴이 방아쇠를 당긴 폭탄선언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이다. 지난 아카데미에서 마고 로비가 여주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어쩌면 우리가 피해자가 될 수도...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본 후 나 스스로를 뒤돌아보며 반성을 했다. 그동안 내가 농담이라며 여자들에게 했던 말장난 때문에 혹시 상처를 받은 이가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도 성적 농담에 발끈하는 여자들에게 남자들은 '혹시 페미니스트야? 왜 그렇게 민감하게 굴어? 오늘 그날이야?'라며 오히려 나무란다. 보수 언론사에서 근무해야 했던 영화 속의 여자 직원들은 더욱 그러한 막말을 버텨야 했는데 케일라의 친한 동료인 제스 칼(케이트 맥키넌)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숨기면서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그러한 성적 폭력에 여성들은 결국 내성이 생기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빈틈을 파고든 것이 로저의 성희롱 사건인 셈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사회 각 층의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당한 성희롱을 폭로하는 것을 보며 내성이 생겨버린 상처가 이제서야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적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성희롱 피해자라는 사회적 인식에 의한 수치심 때문에 그냥 나만 참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보고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물론 성희롱은 여성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베리 레빈슨 감독의 1994년작 [폭로]에서는 컴퓨터 기술 개발팀의 탐 샌더스(마이클 더글라스)가 부사장인 메리더스 존슨(데미 무어)에게 성회롱을 당하면서 겪게 되는 일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당시엔 굉장히 파격적인 영화였는데 지금 다시 봐도 파격일듯싶다. 결국 성희롱이라는 것은 남성, 여성을 가리지 않고 지휘가 높은 자가 지휘가 낮은 이에게 저지르는 범죄의 형태이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여성인 이유는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적 지휘가 높은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미투 운동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외면한다면 언젠가는 바로 우리가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보고 나니 만약 내가 저 입장이라면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한번 그녀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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