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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담 드 퐁파두르, 로코코의 꽃이 되다
6  enterskorea 2018.04.02 14:13:36
조회 229 댓글 1 신고

마담 드 퐁파두르, 로코코의 꽃이 되다 

  

 

(프랑수아 부셰,  '마담 드 퐁파두르 초상)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민혁명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굳건한 체제를 유지하며 최상류층의 문화를 주도했다. 그 중심에 코르티잔이 있었다. ‘코르티잔이란 상류사회 남성이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던 공인된 정부를 의미한다. 이들 중에는 세련된 스타일로 한 시대의 유행을 만들기도 하고,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며 역사를 바꿔놓은 여인도 있었다. 수백 년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코르티잔이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으나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력하게 남은 여인은 아마도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일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 첫 번째 남편 샤를 르 노르망)

 

 

퐁파두르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은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이다. 어머니 루이즈를 닮아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지닌 잔느는 총명함까지 타고났다. 게다가 법적 후원자인 노르망의 정성 가득한 교육이 더해지면서 지성과 미모를 두루 갖춘 매혹적인 처녀로 성장했다. 잔느가 19살이 되던 해, 노르망은 자신의 조카 샤를과 그녀를 결혼시켰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지위, 출신, 신분으로 보았을 때 잔느에게 매우 유리한, 영리한 선택이었다. 유부녀가 된 잔느는 남편 덕분에 사회적 신분이 몇 단계 상승하게 되었고 정식으로 사교계에 진출했다.

 

노르망은 잔느의 결혼선물로 파리 북동쪽에 있는 에티올 영지를 선물했다. 에티올의 영지는 왕실 사냥터와 가까웠다. 덕분에 잔느에게 우연을 가장하여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와 마주칠 가능성이 생겼다. 에티올의 안주인이 된 잔느는 남편과 함께 여러 파티에 참석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자신만의 살롱을 만들어 사교계로 발을 넓혀갔다. 그녀에게 매료된 작가와 예술가, 학자, 시인 등이 그녀의 살롱을 찾았다.  

 

 

(루이 15세) 


이제 막 첫 딸을 출산한 잔느는 왕을 유혹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자신의 오랜 꿈에 도전했다. 이때,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는 오랜 불치병인 지루함과 무기력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루이 15세가 사냥을 하기 위해 에티올 영지를 지나갈 때를 노려, 왕이 가는 길을 일부러 두 번이나 가로질러 갔다고 한다. 루이15세는 이 대담한 미녀에게 관심이 생겼다. 우울하게 연말을 보낸 루이 15세는 새해가 되자 기분전환을 위해 베르사유에서 가장무도회를 열었고, 이때 잔느도 처음으로 베르사유에 초대를 받았다.

 

루이 15세와의 첫 만남 이후, 잔느는 베르사유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베르사유에 머물게 되었다. 왕에게 아내를 빼앗긴 샤를은 결국 이혼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고, 이혼 후 루이 15세는 잔느에게 퐁파두르의 영지와 함께 후작부인의 작위를 내렸다. 평민 출신의 잔느가 루이 15세의 공식적인 애인이자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된 순간이었다. 평민 출신의 여인이 왕의 공식적인 애인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 'Jeann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속 한 장면)

 

 

잔느는 귀족들이 견고하게 쌓아올린 유리 천장을 깨뜨린 인물이었다. 잔느가 왕비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러 온 날, 귀부인들은 그녀가 실수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잔느는 아무 실수도 하지 않았고, 왕비는 이례적으로 그녀를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또한 잔느는 루이 15세를 설득하여 더 이상 왕비를 냉대하거나 방치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리하여 잔느는 사방이 적들로 가득한 베르사유에서 왕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잔느는 명실공이 마담 드 퐁파두르라고 불렸다. 루이 15세는 그녀와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의논했다. 최고 관리들과 회의를 하면서도 수시로 퐁파두르의 방을 드나들며 그녀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는 퐁파두르가 왕과 정치, 경제, 외교적인 주제에 대하여 조금도 막힘없이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로코코 스타일이 드러나는 마담 드 퐁파두르 초상화)

 

 

평민 출신이었던 퐁파두르는 그 어떤 여인보다 우아하고 섬세하며 고급스럽고 세련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잘 알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배경까지 직접 관리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바로 로코코 양식이다. 로코코 스타일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상징이 바로 퐁파두르이다.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대부분이 아기자기하고 정교하게 꾸며진 가구들이 놓인 거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해주는 핑크빛 연지를 볼에 바른 퐁파두르는 가슴이 깊게 파인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사치스러움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아름다운 스타일은 퐁파두르의 활약에 힘입어 루이 15세의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이 되었다.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또한,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에게서 받은 재산을 작가들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아낌없이 펑펑 썼다. 그녀의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볼테르이다. 그는 훗날 유럽을 대표하는 계몽사상가가 되었다.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퐁파두르가 파리에 설립한 왕립 사관학교는 매년 재산이 없는 귀족 남자 500명을 장교로 교육했는데, 이 학교는 나폴레옹을 배출했다.  

 

한편으로 퐁파두르는 왕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든든하고 안정한 보호막은 자식이었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루이 15세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 두 번의 유산을 한 퐁파두르는 왕의 공식 애인이 된지 5년 만인 1750년 이후로는 루이 15세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왕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애인이 되는 대신 그의 친구이자 측근으로 남기를 선택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퐁파두르는 왕에게 직접 젊은 여인들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왕은 젊고 새로운 하룻밤 여인들에게 만족하였고 퐁파두르의 배려에 감동하였다. 오히려 육체적인 관계가 식은 뒤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퐁파두르는 죽는 순간까지 왕의 사랑을 받는 여인으로 남아 공식 애인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죽기 전 완성 된 퐁파두르 부인 초상화)

 

 

17644, 퐁파두르는 열감기가 폐렴으로 번져 죽음을 맞았다. 43살의 나이로 퐁파두르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 15세는 절망했다. 퐁파두르는 베르사유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그녀는 총성 없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전쟁터에서 장장 20년을 버텼고 마침내 승리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삶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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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조민기> 저

미래지식, 2018년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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