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순간에 발을 빼기 위한 좋은 포장이 있다. 바로 '결정장애'. 뚜렷한 취향에 맞는 선택지를 마주하는 경우는 꼭 맞는 취향을 발견하는 일만큼 흔한 일이 아니어서, 주저하게 되는 선택의 타이밍은 너무 자주 찾아 온다. 어떻게 할까 고민될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선택의 짐을 특권처럼 넘기고 났다고 해도, 별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대신 선택해주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할까.

하지만 그런 애플리케이션이 내려주는 것과 같은 단순한 대리 선택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한 명의 결정장애자인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결정장애는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모두가 마음에 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이 아니라 저것, 혹은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어야 하는 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길 원원한다. 그러니 정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제3자가 고민조차 없이 선택한 결과는 쉽게 수긍할 수 없다. '네가 뭘 알아' 싶은 마음이 들면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지금 상황엔 이게 우선이어야 하는 이유, 내가 꺼려지는 것들 중 그나마 이게 나은 이유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근거를 찾기만 하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 아닐까. 사르트르도 "인생은 B(탄생, birth)와 D(죽음, death) 사이의 C(선택, choices)의 연속"이라고 말했듯, 우리 삶은 무수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선택만 잘 할 수 있어도 삶이 훨씬 후회 없고 순탄해지는 것 아닐까. <알고리즘, 인생을 계산하다>는 최선의 선택을 위한 가이드를 자처한다. 어떤 선택을 내리기 위한 근거를 찾는 방법을 컴퓨터과학의 알고리즘에서 찾는다고 했다.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들뜬 마음으로 책을 폈다. 이제 결정장애 따위 탈출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세상에 쉬운 게 있을 리 없지. 결정장애를 극복하고 간편한 삶을 살려면 우선 더 우수한 머리와 냉철한 이성을 탑재해서 다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컴퓨터과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을 간과했지 뭐람. 이 책에서 알려주는 합리적 선택을 위한 알고리즘은 내가 따르기엔 솔직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이 적지 않은 나로선, 일단 주어진 상황을 팩트 기반으로만 두고 생각하는 것도 자신이 없고, 알고리즘에 따라 생각해 볼 끈기도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미련을 두고 불필요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카지노나 이성 관계 같이 답을 알기 어렵고 경험과 밀착된 사례들이 많이 제시되기 때문에 이론 자체로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내 경우에 대입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면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자전거나 수영을 배우는 일과 비슷한 느낌이다. 지금은 자신도 없고 잘 하지 못하지만, 바퀴를 굴리고 물에 떠서 앞으로 나아가던 느낌은 배우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했을 것들이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것들도 실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거리감이 있지만, 한 번 읽고 난 후 조금은 생각의 방식이 달라진 것 같다. 앞으로도 똑부러지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들을 해나가는 일은 많지 않겠지만, 책에서 알려준 방식들을 시도해보는 노력 정도는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만 해도 적잖은 소득이지 않을까.

탐색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함으로써 가장 나은 것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미래를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 p. 81

아마 노년기를 수십 년에 걸쳐 모은 지식을 이용할 기회라고 여김으로써 얻게 될 가장 심오한 깨달음은 이것이 아닐까? 삶은 시간이 흐륵수록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얻기 위해 탐색자가 내놓는 것은 즐거움이다. --- p. 109

언어는 또 다른 천연 올가미가 된다. 더 길게 말을 할 때 듣는 노력과, 듣는 이의 주의 집중 시간에 가해지는 부담이 복잡성에 벌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업 계획은 승강기가 멈추기까지 걸리는 시간 안에 요약해서 말해야 한다. 인생의 조언은 아주 간결하고 머리에 쏙 들어올 때에만 지혜가 담긴 격언이 된다. 그리고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타고난 기억의 올가미를 통과해야 한다. --- p. 299

우리는 현실세계의 요인들을 더 포함시킬수록 완벽한 해답을 찾으려면 불합리할 만치 오래 걸리는 상황에 도달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컴퓨터과학이 어려운 문제라고 부르는 것들에 직면한다. 그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 효과적인 알고리즘은 가정을 하고, 더 단순한 해답을 향한 편향을 드러내고, 오류 비용을 지연 비용과 비교하여 절충하고, 우연을 받아들인다. 이런 행동들은 우리가 합리적일 수 없을 때 하는 양보가 아니다. 합리적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다. --- pp. 482~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