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이기는 힘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중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소’와 <필라델피아> 

1945년도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진홍의 날개>로 음악상을 받은 디미트리 티옴킨은 이렇게 말했다.

“식장에 계신 여러분,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주었고, 나로 하여금 영화 음악의 질적 향상에 공헌케 한 바탕을 마련해준 중요한 인물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요하네스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바그너 등 여러분입니다.”

티옴킨의 유쾌하고도 기발한 발언으로 장내는 폭소가 터졌지만, 클래식이 영화 음악에 미친 영향 때문에 할리우드가 서양 고전 음악으로부터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를 새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부채감을 더욱 짙게 해주는 영화가 <필라델피아>다. 조나단 드미 감독의 1993년 작으로, 에이즈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 영화는 주인공으로 나온 톰 행크스가 그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에이즈에 걸린 한 변호사의 부당 해고를 다룬 <필라델피아>는 한 인간의 개인적 비극과 부당 해고라는 단순한 법리적 문제를 떠나서 다수의 인간이 가지는 소수의 일탈자에 대한 편견과 뜻 모를 증오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워준다. 또한, 결국 평등권의 침해는 우리의 일상사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도 함께 안겨준다. 특히 ‘흑인’ 콤플렉스를 지닌 변호사 조와 동성연애자이며 그로 인해 에이즈에 걸린 앤드류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재판 때문에 만났으나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는 두 사람은 최종 진술을 위한 연습을 갖는데 그때 앤드류가 문득 조에게 묻는다.

“오페라를 좋아하나?”

앤드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는 의아해한다. 앤드류는 마리아 칼라스의 음반을 틀어주며 해설을 해준다. 두 사람은 이내 움베르토 죠르다노, 마리아 칼라스를 뇌까리면서 둘 사이의 진정한 인간적 교류를 막았던 편견을 허문다.

그 음악이 바로 이탈리아 작곡가 움베르토 죠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소’이다.

그들이 나의 어머니를 죽였어요

나의 베르시는 나를 위하여 몸을 팔았다오

나는 허기와 비참함과 삶의 무력함에 죽고만 싶었죠

그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오

‘나는 천사다. 나는 하늘이요, 신성이요, 음악이요, 생명이다.’

비통과 절망의 음색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다. 그녀의 짙은 카리스마가 더욱 극적으로 들리는 이 아리아는 여주인공 막달레나가 혁명가 제라르에게 시인 셰니에의 무죄 방면을 탄원하는 노래다.

1896년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안드레아 셰니에>는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실화로, 혁명운동에는 공감하면서 혁명 지도자의 과격한 방법에 반대하여 처형된 시인 안드레아 셰니에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다. 역시 혁명 때문에 몰락한 백작의 딸 막달레나와의 순결한 사랑과 두 사람의 죽음을 그린 비극이다.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소’는 연인 셰니에를 구명하기 위해 몸을 제라르에게 바치기로 결심한 막달레나가, 혁명으로 풍비박산이 난 집에서 어머니의 죽음까지 목격한 자신이 어떻게 삶과 용기를 되찾았는가를 들려주는 감동적인 아리아다.

이는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해고된 변호사 앤드류가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면서 싸우는 절규와도 오버랩되며 그 애절함이 극에 달한다. 조가 온 힘을 기울여 앤드류를 변호하게 된 건 바로 이때부터다. 물론 앤드류는 결국 세상을 떠나지만 조의 노력으로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인간의 존엄성’은 인정받게 된다.

영화 주제가 워낙 심각한 사안이어서 기막히게 접목되었던 음악의 효과가 다소 뒷전으로 밀려난 감도가 있다. 하지만 최고의 소프라노이나 비운의 삶을 살았던 마리아 칼라스의 저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절절한 음성으로 인해 <필라델피아>의 주제가 더 확실하게 살아났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티옴킨은 죠르다노와 칼라스에게도 큰 감사의 인사를 덧붙여야 할 듯하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소’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영화 속에는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도 종종 흐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부탁으로 쓰인 작품 <외손을 위한 협주곡>은 라벨이 당시 정신병 조짐이 있던 시점에 주목해봐야 한다. 정신병을 이기려는 음악가의 처절한 싸움 속에서 만들어진 선율이 ‘천형’이라는 에이즈와 사회 편견을 이기려는 앤드류의 고통을 대변하는 음악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에 가슴이 또 한 번 뭉클해진다.

사족 하나. 왜 이 영화의 제목은 ‘필라델피아’일까? 물론 앤드류가 살고 있는 도시이고, 법률 회사가 있는 지역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이유는 아니리라. 그리스어로 ‘필라델피아’는 ‘형제애’를 뜻한다. 1682년 윌리엄 펜이 찰스 2세로부터 뉴욕과 메릴랜드 사이 광활한 토지를 받아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중 델라웨어 강과 스쿨길 강 사이 비옥한 땅에 퀘이커적 검약과 기독교적 미덕이 넘치는 이상향을 구상하고 지은 이름이 필라델피아라고 한다. 따라서 미국인들에게 이 이름은 자유, 독립, 정의, 형제애 등으로 상징된다.

<록키>, <버디>, <위트니스>, <마네킨>, <업 클로스 앤 퍼스널>, <12몽키스>, <식스센스> 등의 많은 영화에 도시 ‘필라델피아’가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닐 터! 그렇다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존재를 부인한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정의에 어긋난다. 비록 에이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앤드류의 투쟁은 그 때문에 대단히 큰 의미를 남긴다. 필라델피아의 정의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영화가 사랑한 클래식 <최영옥> 저

다연, 2016년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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