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정여울의 신간이다. 유명 여행지들을 엮어서 보여주는 여행도서를 좋아하지 않아서,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로 유명해진 후에 손을 대는 것을 내켜하지 않아서, 그녀의 그 유명한 여행책은 물론 덩달아 그녀의 다른 책도 읽어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헤세에 관한 책이라는 데 꽂혀 다른 정보에 둔해져버렸기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지나친 선입견이긴 하지만, 다행히 적지 않은 사람이 그렇듯, 손이 가지 않는 작가의 책을 읽게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겐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작가가 꽤 많고, 정여울 역시 여기에 속했다. 

순전히 헤세의 후광과 고운 노란 색을 입은 책 디자인 덕에 읽게 된 이 책은 몇 가지 묵은 생각을 뒤집어 놓게 했다. 하나는 예상할 수 있듯 정여울이라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다소 지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생각처럼 취향에 맞는 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성향이나 스타일이 같지 않더라도 통하는 부분이 있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듯, 그녀에게선 지금껏 만난 누구보다도 헤세에 대한 공감대가 느껴졌다. 나도 무척 좋아하는 헤세지만, 그녀의 헤세에 대한 사랑은 정말 엄청나게 깊이 있고 진지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고백 같은 글을 보니, 내가 느꼈던 헤세에 대한 생각과 헤세의 글을 읽는 시기에 품었던 마음이 그녀의 것들과 참 많이 닮았더라. 우습게도 이 점이 그녀에 대한 존경심 내지 인정, 여기에 반사된 내 애정의 깊이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녀가 고마워졌다.

또 다른 점도 아주 특별한 건 아니다.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 헤세를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헤세의 독일, 헤세의 스위스를 여행해 볼 생각은 딱히 하지 못했었다. 좋아하는 철학자들의 흔적은 그렇게도 훑고 싶었는데 왜 작가의 흔적을 좇는 데에는 열정이 없었을까. 아차 싶은 마음과 함께, 나도 그녀처럼 헤세의 흔적을 따라가보고 싶어졌다. 헤세가 자랐던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헤세가 말년을 보낸 스위스의 정원까지. 정여울의 여행은 헤세의 삶, 헤세의 마음을 따라 이동한다. 이승원 작가의 사진이 여행의 분위기를 더욱 운치있게 만들고 있는데, 사진들이 정말 멋져서 왜 그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승원 작가의 사진이 그녀의 이전 여행 책에도 실렸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도 인기 있었겠지만, 이런 사진과 함께 여행을 권하는 책은 여행욕구를 한껏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독일과 스위스 여행담 사이에는 헤세의 소설을 융 심리학과 연관지어 분석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헤세의 그림과 배치되어 있어 헤세의 마음을 더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행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융에게 영향을 받은 헤세의 소설들에 대한 사색도 차분히 읽기에 괜찮았다. 인용이 아주 많아 좋아하는 헤세의 글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금껏 가장 마음이 괴롭던 시절, 크게 의지할 수 있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부분에서는 한동안 그때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헤세 자신도 말했고 정여울 작가도 말하지만, 헤세의 소설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 역할을 확실하게 해준다. 인간으로서 지니는 고민을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게 하는 그의 소설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책은 그런 우리 마음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48쪽) 

놓아버리니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 때문에 가장 큰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나를 진정으로 아프게 하지 못한다. 나의 갈망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나 자신이다. (84쪽)

헤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작품들 중 몇몇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평을 받으면 오히려 '은밀한 기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작품 중 몇몇이 혹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헤세 스스로에게는 은밀한 자랑, 숨은 기쁨이었다고. 헤세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은 '나만의 정원'이지 모두가 산책할 수 있는 공공의 정원은 아니라고. 그는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그 소수의 작품들을 자기만의 정원처럼 홀로 산책하고 싶어 했다. (309쪽)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 한겨울에도 정원은 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텅 빈 마음을 보여주듯이. (3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