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영화 취화선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접하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입니다. 재미가 있다 없다 어렵다 쉽다의 문제를 떠나 한 시대를 엮어내는 진중함이 너무나 무겁고 어두워서, 한동안은 꺼려졌던 게 사실인데요. 임권택 감독이 다루는 시대 역시 현재인 적은 없다는 것도 거리를 두게 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 저를 다시 불러낸 것이 영화 화장인데요. 아무리 한국 영화사와 시대를 함께 해 온 거장이라고 해도, 자신의 주특기(?)를 모두 내려놓고 그것도 80대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젊은 나이에 하는 도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예감은 얼추 들어 맞았어요. 병든 아내를 보살피면서도 아름다운 젊은 여자에게 끌리는 중년 남성, 그에게 놓인 삶과 죽음의 틈새가 섬세하게 그려지는데요. 영화는 오상무의 감정선을 묵묵히 따라가는데, 어느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 듯 관객들도 덤덤하게 지켜 보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대한 물음을 시작으로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더 많은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됩니다.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희노애락을 온 몸으로 체득하며 인생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연륜이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느끼는 묵직함마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우리 앞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게 합니다.

   ▲ 존재만으로도 소재가 가지는 논란을 막아내는 안 배우님

   삶과 죽음 그 사이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재발한 암으로 생사를 다투는 아내와 젊고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한 남성의 서글픈 욕망과 고뇌를 끄집어 냅니다. 낮과 밤의 풍경이 다르듯 오 상무 곁의 두 여성도 상반된 이미지로 대비되는데요. 재발된 암으로 인해 소멸해 가는 아내와 젊은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추은주, 그 사이에 오 상무가 있습니다. 상황만 본다면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미화된 미완의 불륜으로 오해할 만한 입장인데, 정작 그를 지켜 보다 보면 서글프다는 감정이 일어납니다.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오 상무와 추은주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데요. 원작에서와 달리 추은주라는 인물의 비중이 커졌지만 그녀를 연모하는 마음이나 욕망을 구체화시키는 데 그칠 뿐, 오 상무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녀에 대한 열망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일 뿐인데요. 단순히 아내의 병간호나 지지부진한 일상에 대한 반작용은 아닌 듯합니다. 이 표현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깊고 본능적인 끌림이 아닐까 싶은데요. 누구나 생에 대한 욕구가 있듯, 아직 숨을 쉬는 오 상무는 추은주가 뿜어내는 힘찬 생명력에 반응했을지 모릅니다.

   ▲ 죽어감을 통한 고통과 자괴감, 이게 현실

   꽃도 사람도 피고 지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살아남으려고 하는 암 세포로 인해 시들어가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 자신도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해 항시 소변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하는 상황인데요. 오 상무 역시 소멸에 가까워지는 신세이고 보면, 아내에게 보여주는 헌신적인 남편의 모습도 거짓은 아닌 듯합니다. 이 순간 갑자기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아주 조금 짐작이 갑니다. 그의 선택은 아내에 대한 의리이었지만, 추은주에 대한 열망이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 그 이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끌림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고민과 선택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 삶에 대해 세상과 인생을 관철하는 깊이가 담긴 선문답처럼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데요. 인생은 완전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니,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오 상무의 뒷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평범한 줄 알았는데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영화, 이해의 수준을 넘어 제목이 지는 중의적인 의미를 공감한다면 인생의 '젊음'을 지났을 그런 나이일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