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해요? 아, 저는 파스타요 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식상한 대답도 없겠다 싶을 만큼 파스타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고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음식이다. 데이트 코스로 추천되는 이탈리안 식당 대부분은 파스타 종류가 다섯 가지 내외이고, 그 이름부터 종류도 한결같다. 덕분에 어릴 땐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전부인 줄 알았고 파스타로 만들 수 있는 메뉴가 많아야 열 개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발로 좀 더 먼 곳까지 다닐 수 있게 되고 숨은 맛집을 찾아다니는 시도를 하게 되자, 파스타는 말도 안 되게 다양했고 파스타 레시피는 믿을 수 없게 많았다. 

파스타의 넓디 넓은 세계를 발견하게 되자, 다음 스텝은 파스타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파스타와 파스타 이름, 그걸로 만든 음식의 이름을 잘 외운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인정 받기는 커녕 잘난 척 하는 모양새가 되겠지만, 그래도 내가 뭘 시켰는지 최소한 이름이라도 알아주고 싶었다.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불러줘야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음, 펜네가 나왔네! 할 건 아니어도 알아두고 싶은 마음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들인 책이 <파스타의 기하학>이다. 

파스타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듣도 보도 못한 파스타들과 레시피가 소개되어 있는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디자인이다. 한국어판이 정말 예뻐서 원서 검색을 해보니 내지 편집까지 원서와 한국어판이 거의 동일한 것 같았다. 설계 도면처럼 말 그대로 기하학적인 파스타의 모양을 그려두었는데 그림책으로 보아도 좋을 만큼 무척 참신하고 예쁘다. 심플하게 흑백으로만 꾸며진 책이지만 오히려 단정한 그림과 글자에서 파스타와 소스가 어우러져 알록달록한한 음식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요리책인 걸 모르고 샀지만, 요리책임을 깨닫게 된 후에도 재밌게 읽었다. 그림만 봐도 흥미로운 책이긴 하지만, 재치 있고 깔끔한 문체는 조리법을 문학처럼 읽게 만든다. 몇 구절 옮겨 놓는 것보단 전체적으로 배어 있는 톤을 읽는 게 훨씬 재미있는 귀여운 문체. 파스타의 이름과 생김새 뿐 아니라, 사이즈와 어원도 알려준다. 이름과 같은 이탈리아어 단어는 무엇이 있는지, 비슷한 모양의 파스타는 어떤 게 있는지도 명시해두어 헷가려하는 독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친절하기까지 한 저자는 그 파스타의 어원 내지 사연과 관련 속담도 적정선까지만 알려주며, 전문 분야인 요리법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전문가다운 명쾌한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일화를 이야기할 때도 종종 있는데, 나름 눈여겨 볼 만한 것 같다. 물론 이 파스타 요리들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만 해당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릴 때부터 지내온 환경과 부모 내지 조부모의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생각해보게 한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이 그의 파스타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핀 게 틀림없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딱 짚어 어떤 교육이 좋고 나쁘다 말하긴 곤란하지만, 확실히 교육은 중요한 모양이다. 

결론적으로 애초의 목적은 실패했다. 파스타의 이름을 알아두겠다는 포부는 1/3을 읽기도 전에 사라졌다. 너무 방대하고 이름도 어려워 굳이 이걸 외워서 뭘 하나 싶었던 것. 대신 자주 먹던 파스타들은 확실히 이름을 외웠고, 어원과 설화 등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소개된 레시피들을 내가 사용할 일이 과연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파스타를 더 친숙하게 생각하게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파스타를 간간이 먹는 사람에게도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긴 할 테지만, 파스타 요리를 직접 하는 데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아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에서 수세기 동안 내려온 파스타 개발, 제조업과 농업, 빈곤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무수히 많은 맛과 모양으로 파스타 안에 녹아들어가 있다. 물론 발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양이 엉망인 파스타가 몇 개 정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파스타들조차 어울리는 소스 레시피들이 존재한다. (6쪽) 

짧고 굵게 살기로 결심한 나로서는 실은 양념을 왕창 넣어 맛있게 먹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것이란 생각에, 일찍 죽지 뭐... 하며 소금 간을 하곤 한다. 이렇게 짜게 먹다 후회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8쪽)

나의 할머니 아그네스는 그녀가 헝가리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이 요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종종 말씀해주시곤 했다. 할머니처럼 이 레시피를 사랑하기까지에는 좀 별난 맛이지만, 아침식사로는 참 괜찮다. (235쪽, 빵가루와 설탕을 뿌린 스파게티)

파스타를 만들어 낸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의 손에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제가 매일매일 즐겁게 먹고 있으니까요. (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