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책과 멀어졌다. 또 글쓰기와도 멀어졌다. 책읽기와 글쓰기는 한묶음으로 가는 것이다. 인풋이 없으면 아웃풋이 없다.  당연한 이치다.  책과 멀어져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사이 머리는 점점 굳어져 가고 글쓰는 시간은 좀체 낼 수조차 없었다.  나는 항상 책읽기와 글쓰기를 부업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본업에서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건 영원한 부업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게 본업보다 더 재밌고 흥미롭다면?  되돌아보니 근 3년간은 정말 성실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쓴 듯 하다.  아마, 지금과는 좀 다른 본업의 업무환경 덕분일 것이다.  요즘 일상은 정신의 번아웃(burnout) 상태, 즉 소진 상태라고 봐야겠다.  사람에겐 한정된 에너지가 있다.  그 이상의 에너지를 쓰려하면 과부하가 걸린다. 

업무 환경이 바뀐지라 책읽고 글쓰는 전략을 좀 바꿔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내 글쓰기는 철저하게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주였다.  한달에 책 몇 권, 서평 몇 편을 반드시 읽고 쓴다는 걸 목표로 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3년간은 문제없었다.  번아웃 상태에 이른 지금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 목표량을 밀어부치거나 그러다 쓰러지거나?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전처럼 책을 적게 읽고 서평을 적게 써야겠다.  내 책읽기와 글쓰기를 되돌아볼 시간도 필요했다.  일본의 유명한 독서가이자 서평가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청어람미디어, 2001)는 이 즈음에 내게 새롭게 독서와 글쓰기 방향을 설정케 해 준  책이다.

1980년대에서 90년대 독서 인생과 경험을 담아낸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마디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독서광의 일상을 그려보인다. 한해 수천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국내 언론에도 소개된 책으로 가득한 4층짜리 `고양이 빌딩'의 건물주이자 전공을 넘어서 다채로운 주제로 수많은 책을 펴내고 있는 저술가이기도 했다. 서평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중,고교 시절엔 이미 세계문학과 일본 문학을 독파할 정도로 조숙했다. 대학을 졸업후 잡지사에 얼마간 근무한 것을 빼고 그는 프리랜서 독서가이자 서평가로 일생을 보내왔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어떻게 책을 읽어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에 실린 `퇴사의 변'이란 글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겠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할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내 경우, 하고 싶은 일이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보는 것뿐이다. " 그 정도라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 좀더 참아 봐.  다른 편집부로 옮기면 책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거야"라고 충고해 주는 사람도 몇 있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서재의 서가 앞에 앉으면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조함이 엄습해 왔다." "  183쪽,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하여,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독서가이자 서평가 혹은 저술가의 길을 갈 것을 다짐한다.  밀린 책을 읽기 위해 본업을 포기한 사람이 바로 다치바나 다카시였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그가 `하고 싶은 일'이었으나 그걸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짓은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열정을 따라할 수 있을지언정 그가 걸어온 삶을 흉내내기란 쉽지 않다.  일본은 잡지가 단행본 출판보다 더 발달된 나라다. 그가 이 책을 썼던 198,90년대는 특히 일본 잡지의 전성기여서 잡지사에 실릴 양질의 원고는 공급부족 상태였다. 그는 바로 잡지사의 수요에 발맞춰 훌륭한 원고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는 한편의 원고를 쓰기 전에 100편 이상의 참고 자료를 읽는 원칙을 정해놓고 작업했다.  많은 자료에 대한 독서가 좋은 원고를 만든다는 변치 않는 법칙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세계적인 독서가로서 그가 제시한 14가지 독서법도 흥미롭다.  그는 이것이 취미를 위한 독서법이 아니라 일반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법이라 주장하는데, 주된 내용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다. 

열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끝이다. 그것은 불씨와 같아서 죽어버리면 살리기가 쉽지 않다. `먹고사니즘'이 열정을 꺼뜨리지 않도록 모든 독서가들은 조심할 일이다.  더군다나 가을 하늘은 얼마나 높고 푸른가. 이번주엔 내장산의 단풍이 나를 부른다.  이렇게 날씨까지 좋으면 방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비극에 가깝다.  요며칠 의욕을 불태우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손에 잡았다 더 큰 부작용에 독서와는 영원히 담쌓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게을렀고 힘겨웠던 9,10월이 간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일생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진짜 고수들은 어떻게 읽고 쓰는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열정의 `리부트'에 보태 몇가지 소득이 없지 않았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평생 모은 책으로 거대한 지의 왕국을 세웠다. 그가 기획하고 친구에게 설계를 맡긴 `고양이 빌딩'안에는 수만권의 장서가 보관돼 있다.  비좁은 공간을 훌륭한 개인 도서관이자 집필실로 꾸민 모델이다. 누구든 뜻만 있다면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이런 건물은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독만이 진정한 독서라고 고집해온 내게 다카시의 속독과 통독법에 대한 유연한 사고도 참고할 만 했다.  정독만으론 1년에 50권 읽기도 벅찬게 현실이다.  만약, 다카시 같은 방법을 쓴다면 1년에 그 10배를 읽는 일도 가능할 것이고 진짜 보배같은 책을 만날 확률도 더 늘어날 것이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그에 100배에 해당하는 자료를 읽는다는 다카시의 집필 방식은 게으른 서평가들에게 모범이 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