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2 / 김별

벌판에서 마주친

들국화 노란 빛깔이

시리다 못한 눈을 다칠 것 같고

진하디 진한 향에는 취기가 돌아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철새들이 하늘을 다 비워 놓았습니다

그렇게 발걸음도 시간도 멈추어 버리게 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활짝 핀 갈대 몇 대궁,

고운 물이 든 단풍잎 몇 장,

그리고 환히 등을 밝힌 감 한 소쿠리를 안고

그녀가 이슬 묻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선뜻 손을 내밀기가 무안해

쭈뼛거리듯 어정쩡하게 섰는데

내미는 그녀의 손이 따듯하고 차갑습니다

웃는 듯 우는 듯 눈가에 서린 미소는

들국화 꽃잎을 닮아

어두워져버린 하늘을 다시 올려다 보았습니다

들국화가 만든 빛깔과 향기 속에

능선을 따라 이어졌던 험한 세월이 다 녹아있듯

청옥빛 하늘가에서 따온 감 속에는

햇살과 바람과 떫기만 하던 아픔까지

아직 딱딱한 단맛으로 다 녹아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말없이도 충분한 것이

응답할 수 없는 것이 있겠지요

그 마음. 그 눈길, 그 미소처럼 말이지요

나는 그렇게

아무리 돌을 맞아도

아프다 말이 없는 강물처럼 한없이 깊어져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의 상처만 감싼 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흘러가는 것이 강물과 세월과

이미 놓아버린 마음만은 아니겠지만

대나무처럼 마디마디 하루하루 비어 간 가슴 속을

어느새 메마르고 차가워진 바람이 차지합니다

바람도 찢어지고 고단했을까요

밤새 웅웅 소리를 내며 울지만

동굴이 되어버린 내 가슴 속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합니다

노래도 그리움도 되지 못하는 소리,

다만 부저까락처럼 가슴 속을 속속들이 저미는

소리마저 기어이

향기 잃은 마른 들국화 꽃잎처럼

풀풀 흩어집니다

그대여

행복은 무지개 같은 것이라

사랑은 흰 손가락에 끼워준 풀꽃반지 같은 것이라

말하지 말아요.

다만 세상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는 날

댓잎이 뒷문을 치는 토막집으로 와

하룻밤 묵어가지 않으시려는지요

이 가을은 그대를 기다려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만

오늘도

차마 붙이지 못한 가을 편지를

다시 낙엽 속에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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