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맛
조약돌 2014.03.15 19:23:10
퇴근하여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수한 음식 냄새가 식구들보다 먼저 다가와 반겨준다. 식탁을 둘러보지 않아도 오늘저녁 메뉴가 무엇인지 금방 짐작할 수 있는 향수를 자극하는 익숙한 고향의 냄새다. 돌이켜보니 이역만리를 떠도는 나그네 생활도 어느새 강산이 세 번 바뀔 만큼 훌쩍 지나갔다. 풍물이 전혀 다른 남의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 보니, 식구들이 먹는 음식과 식단의 풍경도 어쩔 수 없이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외국생활을 막 시작하던 당시만해도 거의 동양식이던 우리 집 식탁이 세월이 가면서 동서양으로 팽팽한 힘 겨루기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저울추는 빵, 소시지, 버터, 치즈, 샌드위치, 피자, 샐러드, 스테이크로 대변되는 서양식으로 기울어 버렸다. 동서양의 불균형이 점점 심화되더니, 이젠 아예 저울추를 도저히 되돌려 놓을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경사각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점령군이 토착세력을 몰아내고 세도가 등등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 요즈음의 우리 식단의 풍경이다.
시리얼, 우유, 팬케이크, 바나나에게 아침식탁의 자리를 양보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며, 점심 도시락도 치즈와 햄, 토마토를 넣은 샌드위치에게 왕좌의 자리를 넘겼다. 간편함이란 무기를 앞세워 현지에 적응하고픈 눈물겨운 도전장에 밀렸다고 할까. 하나 둘, 소리 없이 사라지는 향토음식의 처지를 보면서 왠지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듯한 착잡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음식은 곧 사람의 정서를 대변한다. 우리 민족의 상징인 고유의 음식들이 현지 식에 밀려 그 위상과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서글픈 상황에서, 다행히 식탁에서 내몰리지 않고 당당하게 제자리를 지켜주는 친구가 하나 있어 고맙다. 바로 오늘 퇴근하는 나를 에워싸고 후각을 자극하여 식욕을 유혹하는 구수한 쇠고기 국이다.짐짓 생각하기에는, 김치나 된장국이 그 선봉장에 있을 법한데, 실제로는 이 친구가 홀로 고군분투하여 우리 집 식탁을 지켜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할까.
하고많은 우리의 전통음식들을 밀어내고 하필이면 쇠고기 국이냐, 그 사연이 약간은 궁금해하실 분도 있겠다. 어린 아기 때 부모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와 이미 북미문화에 동화된 우리 아이들이다. 밥과 된장보다는 빵과 치즈를 더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쇠고기 국이 등장하면 빵과 치즈를 제쳐놓고 즐겨먹으니 기특하고 신기한 일이다.
가족들이 잘 먹어주겠다 육류가격도 저렴하겠다 게다가 소화, 영양, 맛 모두 만점이니 아내는 쇠고기 국 자랑이 대단하다. 덕분에 나는 어린 날 고향에서 먹던 어머니의 손맛을 음미한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허기진 향수도 달래고, 고향을 먹고 추억도 먹는다. 그때는 명절이나 가족들의 생일, 특별한 날에나 먹었으니 쇠고기 국의 추억은 언제나 포근하고 아름답다.
어머니가 끓여주신 쇠고기 국은 하얀 무를 대충대충 쓸어 넣고, 머리를 따낸 콩나물에 대파를 큼직하게 썰고, 매콤한 풋고추와 토종 마늘을 듬뿍 넣었다.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은 낙엽이 후드득 지는 쓸쓸한 가을이 제격이다. 하얀 햅쌀밥에 뚝배기가 철철 넘치도록 퍼주는 국을 말아 싱싱한 푸성귀 겉절이 척척 걸쳐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 돌아가셔도 모른다. 그 국물 맛에 우리는 한국인의 힘과 끈기를 길렀고, 영원한 어머니의 사랑을 먹었던 귀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아내는 쇠고기 국밥을 저녁메뉴로 식탁 위에 올렸다. 이것저것 따로 반찬을 장만할 필요도 없이 매콤한 깍두기 한 접시면 그만이다. 각자의 밥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을 한두 족대씩 퍼주면 된다. 가족들이 즐겨먹고, 음식 만드는 아내가 간편하여 좋다며 행복해하니 적어도 우리 식탁에서는 이 친구가 쉽게 사라지는 불행한 사태는 없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대세에 어쩔 수 떠밀려 가면서도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매달리고픈 심정이랄까.
이렇게 우리식구들의 사랑을 흠뻑 받아왔던 국밥이지만, 온 세상을 긴장시켰던 광우병의 여파로 한 때는 우리 집 식단에서도 밀려났던 뼈아픈 역사도 있다. 예전처럼 뻘건 쇠기름들이 둥둥 뜨는 원조 쇠고기 국밥을 만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푹 고아진 소고기, 파, 양파, 무, 숙주나물, 토란줄기에다 매콤한 고춧가루와 마늘 양념 맛이 어우러진 얼큰하고 구수한 국 맛은 오래오래 우리의 미각을 지켜줄 같다.
서양음식의 공세에 맞서 우리의 식단을 여태껏 외로이 잘 지켜 왔듯이, 훗날 서양음식의 득세가 점쳐지는 아이들의 식단에서도 이 기특한 친구가 오래 버티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음식은 그 나라의 상징이며 뿌리의 원천이다. 세계 어디를 떠돌던 우리는 영원한 한국인임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뚝딱 비워낸 아이들의 빈 국그릇을 바라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