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숨기고 상처를 감내하는 법은 배웠지만

거절에 정당하게 항의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느릿느릿 시끌시끌한 배를 타요

여기는 한산도, 충무공 아저씨의 현역 시절 근무지

약간은 피곤했지만 기분이 좋았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좌우가 바뀌어 되려 불편하게 만드는 안내도에는 불합리할 정도로 화를 냈다

중학교때 아빠엄마따라 한산도에 왔던 기억에 새록새록한데

어찌된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기억만 죄다 딜리트되어있다

그러고보니 통영 도착한 첫날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숙박업소인 통영(그때는 충무) 목화장여관을 내비로 찍어보고는

같은 곳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왠지 뭉클하고 감개무량했던 바 있다

더불어 생애 첫 충무김밥이 뭐 이딴 가난한 아저씨같음? 이라고 분개했던 기억도 불쑥.

항구와 충무공유적지까지는 20분 정도의 구불구불 해변 산책로가 나 있는데

그래서 유람선은 우리를 한시간 뒤에 데리러 온다

한산도 제승당 - 해금강을 도는 유람선인 '해금강 코스'(2만원)는

비수기를 맞아 몇 개 안남은 상품 중에 그나마 제일 긴 세시간 십분 

선선하면서도 조금 빠르게 걸으면 쉬이 몸이 덥혀지는 알맞은 날씨와

어떤 무례한 직원을 두고 "여기서 일한다고 지가 충무공인 줄 알어!!'라며 점잖게 꾸짖는 한 아저씨 덕분에

우리는 푸흡푸흡 거리며 부러 구석까지 찾아가서 허리가 꺾이도록 웃어댔다

그리고 막 한글을 읽기 시작한 꼬마 아가씨가 내 앞을 가로막고 안내문들을 읽어줘서

나는 세계 최연소 가이드의 더듬더듬 코리언 보이스 가이딩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참으로 다사다난한 역사와 결국은 승리라는 뻔한 플롯을 참으로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그런데 한산도대첩 설명 판넬을 보고 계산을 해본바

학익진 안쪽까지 들어왔다가 살아서 도망친 일본인 삼십여명은 대체 어디로 갔던 것일까

북악산성 김신조사건의 의문의 1인의 행적과 함께 실종자 궁금 리스트 업뎃~

신발까지 벗고 수루에 올라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 읽어보는 저 유명한 시조

사실 다들 그리 하고 있어서 언뜻 돌림 랩을 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ㅎ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셨을 때 펼쳐졌을 풍경

한산도는 단지 제승당이 있는 이 섬만이 아닌, 인근의 흩어진 꼬마섬들을 다 이르는 바

겹겹의 발처럼 되어 있어 전략을 짜는 데 유리했던 지형이지 싶다

이제는 꽤나 닮았다고 듣는 우리 남매는

기분이 좋으면 과도한 친절을 베풀려 한다는 점도 닮았던지

시판과 한 프레임에 찍히고 싶은 아저씨들 무리에게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까지 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폭력과 강탈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일 뿐인데

그래도 싸움은 이겨야 하고 추앙하며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까

심지어 세월따라 신격화되고 하나의 인간 이상의 존재로 굳혀지는 현장에서

달달한 오미사꿀빵까지 먹은 내 입에서 문득 쓴 맛이 났다

충무공은 이 활연습장에서 종종 활쏘기내기를 붙였다는데

에이, 말도 안돼 하면서도 한편으론

절대 패배하는 법 없는 귀큰 엘프들도 여지껏 활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가능했을 것 같기도. 

한시간이 흘러 한산도 제승당 타임이 지나고

그리 아름답고 무한하다는 해금강을 향해 출발

약간 흐릿하던 하늘도 구름을 걷고 햇님을 말짱하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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