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생각에 wavve에서 본 영화들... [캔 유 킵 어 시크릿?], [시빌], [포르투나의 눈동자]
지난 4월 3월 wavve 팩에 가입했었다. wavve 팩에 가입하여 볼 수 있는 영화 중 보고 싶은 영화는 [고흐, 영원의 문에서] 뿐이었지만 첫 달 가입료가 100원이었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가입했다. 당연히 [고흐, 영원의 문에서]를 본 후 자동 결제를 해지하려 했다. 그런데 자동 결제를 해지하지 않으면 10,000 코인을 주겠다는 안내에 마음이 흔들렸고, 결국 10,000 코인에 혹해서 볼 영화도 없는 wavve 팩을 한 달 더 연장하고 말았다.
10,000 코인 덕분에 보고 싶었던 [하이, 젝시]와 [숀더쉽 더 무비 : 꼬마 외계인 룰라!]를 볼 수 있었지만 wavve 팩은 7,900원 자동 결재 후에도 볼 영화가 없어서 그대로 방치 중이다. (나 대신 아내가 미드 <체인지 디바>를 보는데 유용하게 이용했다.) 물론 아쉬움은 없다. wavve와는 달리 볼 영화가 무궁무진한 넷플릭스가 내겐 있으니까. 하지만 은근히 본전 생각은 났다. 그래서 6월 3일까지 최대한 wavve에서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기대작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영화적 재미는 갖추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 로맨틱 코미디 [캔 유 킵 어 시크릿?], 제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인 프랑스 영화 [시빌], 그리고 일본의 판타지 로맨스 영화 [포르투나의 눈동자]가 선택되었다.
캔 유 킵 어 시크릿?
감독 : 엘리스 듀란
주연 : 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 테일러 후츨린
첫 출장에서 최악의 하루를 보낸 엠마(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비행 공포증과 난기류로 인한 두려움에 그만 옆자리의 낯선 남자 잭(테일러 후츨린)에게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행히 엠마의 우려와는 달리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하고 엠마는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잭과 헤어져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아뿔싸!!! 잭이 엠마 회사의 창업주였던 것이다. 직장 생활이 제대로 꼬여 버렸다고 생각한 엠마. 그런데 웬일... 모든 것을 갖춘 완벽남 잭이 엠마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이 아닌가?
[캔 유 킵 어 시크릿?]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이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가 그러하듯이 가장 먼저 여배우의 귀여운 매력에 영화의 재미를 기댄다.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에서 아나베스 체이스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오른 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는 [나이트 헌터]에서의 악몽과도 같은 어색 연기를 벗어던지고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맘껏 귀여움을 발산한다. 엠마가 비행공포증 때문에 잭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은밀한 사생활까지 가식 없이 까발려버리는 엠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라면 이 정도의 매력은 갖추고 있어야지.
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의 매력이 영화 재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가 그러하듯이 엠마와 잭은 밀고 당기는 사랑 끝에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다. [캔 유 킵 어 시크릿?]이 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의 매력 덕분에 기본적인 재미를 갖춘 로맨틱 코미디는 될 수 있어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한 획을 긋는 걸작은 되지 못한 이유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엠마와 잭의 갈등이다.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진행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잭이 TV 인터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보통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엠마의 비밀을 무심결에 털어놓으면서 한차례 위기를 맞이한다. 엠마는 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잭은 첫 만남에서부터 엠마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황. 자신의 비밀이 가벼운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엠마는 분노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회사 동료들은 어떻게 잭의 인터뷰만으로 그것이 엠마라는 것을 눈치챘을까? 차라리 엠마를 질투한 회사 동료인 아르테미스(케이트 이스턴)가 엠마와 잭의 관계를 눈치채고 잭의 인터뷰 상황에서 그 사실을 폭로한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두 번째 갈등은 잭이 엠마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화해하면서 진행된다. 엠마의 복수를 위해 가십 기자를 데리고 나타난 엠마의 친구 젬마. 그 장면을 하필 잭이 목격을 하고 오해를 한 것이다. 솔직히 잭의 비밀도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너무 우연이 겹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엠마와 잭의 첫 만남부터 기적 같은 우연이 이미 시작되긴 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엠마와 잭의 갈등이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1시간 3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의 귀여운 매력을 만끽하고, 마지막에 환하게 웃는 엠마와 잭의 모습에서 훈훈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이 영화는 제 할 일을 다한 셈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걸작이 아니면 또 어떤가. 최소한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는 갖추고 있으니 본전 생각나서 선택한 영화치고는 꽤 성공적인 영화였던 셈이다.
시빌
감독 : 저스틴 트리엣
주연 : 버지니아 에피라, 아델 에그자르코폴로스, 가스파르 올리엘
심리치료사인 '시빌'(버지니아 에피라)은 오랜 고민 끝에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모든 환자들을 정리한다. 하지만 유망한 여배우 마고(아델 에그자르코폴로스)의 상담 요청만큼은 거절하지 못한다. 원치 않은 임심을 한 마고는 중절 수술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고, 마고의 일이 왠지 남일 같지 않은 '시빌'은 점점 마고의 삶에 깊게 개입하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시빌]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프랑스 영화이다. 그러한 이 영화의 이력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맞다. 영화는 보통의 상업 영화와는 달리 어렵다. '시빌'의 과거와 현재가 어지럽게 얽혀 있어서 자칫 멍 때렸다가는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이 버거워진다. '시빌'이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도 잘 이해가 안 되고, 그래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뭐 그건 영화의 잘못이 아닌, 예술 영화에 낯가림이 심한 나의 빈약한 영화 취향 탓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확실한 것은 [시빌]이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애초에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일까? 솔직히 고백한다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실화 : 숨겨진 비밀]과 비슷한 영화일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실화 : 숨겨진 비밀]은 베스트셀러 작가 델핀(엠마누엘 자이그너)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미스터리한 여인 L(에바 그린)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델핀은 L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점점 현실과 상상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시빌]은 [실화 : 숨겨진 비밀]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주인공이고, 주인공이 한 여성을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나는 혹시 마고가 '시빌'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은 아닐지, 그것이 아니라면 마고가 '시빌'에게 접근한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을 하며 영화를 봤다. 하지만 그런 거... 없다.
[시빌]의 하이라이트는 외딴섬에서의 영화 촬영 현장이다. 마고가 '시빌'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굳이 마고를 위해 영화 촬영장인 외딴섬까지 따라가는 '시빌'도 이해가 안 된다. 외딴섬에서의 영화 촬영은 마치 코미디 영화 같았는데, 유명 영화배우이자 양다리를 걸친 바람둥이인 이고르(가스파르 올리엘)와 마고의 불편한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 감독 미카(산드라 휠러)의 고군분투 등이 영화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은 실웃음을 안겨준다.
마고의 연기를 도와주던 '시빌'은 결국 이고르와 잠자리를 갖는 사고를 치는데, 영화 내내 '시빌'이 첫아이의 아빠이자 옛 연인인 가브리엘(니엘스 슈나이더)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도 이고르와 부적절한 섹스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 후반부 영화 시사회 파티장에서 술에 취해 진상 짓을 벌이는 '시빌'이 짜증스럽게만 느껴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래서 도대체 왜 저러는 건대?'라는 의아함만 남는다.
그래, 내가 이해력이 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저스틴 트리엣이라는 여성 감독이 그려낸 여성의 심리에 대해서 남성인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하지만 무슨 대단한 비밀과 상처를 안고 사는 듯 행동하는 그녀들의 난리 법석은 이 영화를 재관람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내게 의문으로만 남을 듯하다. 역시 나는 예술 영화, 특히 프랑스 영화를 즐기는 부류는 아닌 듯하다.
포르투나의 눈동자
감독 : 미키 타카히로
주연 : 카미키 류노스케, 이리무라 카스미
[강철의 연금술사]를 본 후 일본 영화는 한동안 안 보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그러한 선언에 일본의 로맨스 영화는 열외이다. 특히 로맨스에 판타지가 살짝 가미된다면 최소한 기본 이상은 한다는 사실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 등으로 이미 확인을 마쳤기 때문이다. [포르투나의 눈동자]는 어릴 적 겪은 비행기 사고 이후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의 눈동자'를 갖게 된 신이치로(카미키 류노스케)에 대한 이야기이다.
끔찍한 비행기 사고를 부모를 잃은 신이치로는 일에 몰두하며 생기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옹 몸이 투명하게 보이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뒤쫓다가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다. '포르투나의 눈동자'를 가진 신이치로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은 투명하게 보이는 것. 하지만 그는 그 능력으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외면하고 모르는척하며 살아갈 뿐. 그런데 핸드폰 수리점에서 만난 밝고 따뜻한 성격의 아오이(아리무라 카스미)를 만나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아오이의 몸이 투명하게 변하는 것을 발견한 신이치로는 아오이에게 무심결에 데이트를 신청하고, 신이치로와의 만남을 위해 퇴근길 사고를 피한 아오이는 죽음을 면한다. 하지만 아오이의 운명을 바꾸며 신이치로는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되는데...
만약 내게 '포르투나의 눈동자'가 생긴다면 나 역시 사고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놓고 영웅 행세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내 주변의 사람들만큼은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운명에 제멋대로 끼어든 대가가 나의 목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누구라도 입을 꾹 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이가 내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거 참 난감해진다. 죽음은 두렵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면서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신이치로는 그러한 딜레마에 빠진다. 어쩌면 그가 일에만 몰두하며 생기 없는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이유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과의 관계가 많아질수록 그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운명도 많아질 테니까. 그렇기에 그는 첫눈에 반한 아이오의 자신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인 카센터 사장의 목숨을 구하지만, 카센터를 찾은 손님의 죽음은 애써 못 본척한다. 이미 두 사람의 운명에 개입한 대가로 그는 협심증을 앓고 있기에 더 이상의 운명 개입은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기차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운명에 처하고 아오이 역시 그 기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이치로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는 달린다.
[포르투나의 눈동자]는 아주 절절하게 신이치로와 아오이의 사랑을 담아냄으로써 마지막 아오이를 구하기 위한 신이치로의 희생에 감동을 안겨준다. 물론 그의 희생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포르투나의 눈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을 테니, 기차를 멈춰 세우기 위해 갑자기 철로 위에 뛰어든 신이치로의 행동은 오히려 수상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그 덕분에 아오이를 살렸으니... 기차가 멈추는 것을 본 신이치로의 마지막 표정은 진정 행복해 보였다.
기대했던 대로 [포르투나의 눈동자]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카미키 류노스케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매력도 상당했고 신이치로와 아오이의 사랑을 담아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의 연출력도 깔끔했다. 다만 영화 마지막 후반부의 사족은 너무 길었다. 신이치로의 희생 이후 아오이의 내레이션으로 신이치로와 아이오의 인연을 설명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길어서 조금 닭살 돋았다. 그것만 제외한다면 [포르투나의 눈동자]는 영화를 본 후 나름 여운을 느낄 수 있는 판타지 로맨스 영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