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독 : 권오광

주연 : 박정민, 류승범, 최유화

​

​

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도 잡아본 사람이야.

​

​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는 [지존무상], [도신 : 정전자]와 같은 홍콩 도박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들 영화에서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기본이고, 스트레이트 플러쉬, 포카드는 아주 하급 족보인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포커를 해보면 안다. 하루 종일 해도 포카드 한번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평생 포커를 해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단 한 번 잡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나는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잡아봤다. (자랑은 아니지만...)

수능을 준비하며 오전엔 학원, 오후엔 아르바이트를 했던 1993년의 어느 날,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동료들끼리 심심풀이 포커판이 벌어졌다. 당시만 해도 나는 포커를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 해 본 적이 없기에 족보도 잘 몰랐다. 그런데 그런 내게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뜬 것이다. 함께 포커를 하던 동료들은 실제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처음 본다며 나를 영웅시했다. 그때의 짜릿한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내게 독이 되었다. 물론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잡았던 그 판은 몇 만 원을 땄지만, 이후 내가 무슨 엄청난 '도신'이라도 된으로 착각하여 히든카드를 노리며 겁 없이 마구 배팅을 했다. 결국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벌은 아르바이트비를 모두 잃은 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그것이 도박꾼의 처첨한 말로인 것이다. 그날의 값비싼 수업료 덕분에 지금도 나는 도박을 멀리하고, 재미 삼아 친구들과 화투판, 포커판을 벌여도 내가 잃어도 되는 돈을 미리 정해놓고 그 돈을 잃으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

​

​

화투가 아닌 포커라니...

​

​

[타짜 : 원 아이드 잭]을 봤다. 2006년 최동훈 감독이 [타짜]가 흥행에 성공하며 2014년 [타짜 : 신의 손]으로 연결되었고, [타짜 : 원 아이드 잭]은 '타짜 시리즈'의 3편이다. 하지만 '타짜 시리즈'는 도박을 소재로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리즈 간의 접점이 별로 없다. [타짜]의 주인공은 고니(조승우)이고, [타짜 : 신의 손]에서는 함대길(최승현)이며, [타짜 : 원 아이드 잭]에서는 도일출(박정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타짜 : 신의 손]에서는 [타짜]의 고광렬(유해진)과 아귀(김윤석)를 소환하여 어느 정도 접점을 찾아냈지만, [타짜 : 원 아이드 잭]은 도일출이 [타짜]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짝귀(주진모)의 아들이라는 설정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도박판을 화투에서 포커로 소재에 변화를 주며 오히려 이전 시리즈와의 단절을 선언하기도 한다.

'타짜 시리즈'가 매년 추석 시즌에 개봉해서 좋은 흥행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소재가 화투이기 때문이다. 명절에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이 제사를 지낸 후 친목을 위해 화투판을 벌이는 것은 흔한 풍경이고, 그러한 화투의 친근감이 '타짜 시리즈' 흥행의 버팀목이 된 것이다. 그런데 [타짜 : 원 아이드 잭]은 화투를 버리고 포커를 선택했다. 과연 추석에 가족들이 모여 포커를 하는 집이 있을까? 1980년대 후반 홍콩의 포커 영화가 잠시 유행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타짜 원 아이드 잭]에 대한 불안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힘을 내요, 미스터 리], [나쁜 녀석들 : 더 무비]에 이어 추석 대목을 노리고 개봉한 세 편의 기대작 중에서 마지막으로 [타짜 : 원 아이드 잭]을 보고 왔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 26년 전 우연히 잡았던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짜릿한 기분을 떠오르기도 했고, 1980년대 후반 열광했던 [지존무상], [도신 : 정전자]에 대한 추억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

​

​

도일출의 기분을 알 것 같다.

​

​

[타짜 : 원 아이드 잭]은 짝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짝귀의 아들 도일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도일출은 공부보다는 포커판에 더 관심을 가진다. 학원 수업을 들을땐 감기는 눈을 주체할 수 없고 학원의 칠판이 포커판으로 보이지만, 포커판에 가면 정신이 또렷해지고 얼뜨기 도박꾼의 뻥카 정도는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실력자이다. 포커판에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 천만 원에 도달했던 어느 날 마돈나(최유화)라는 묘한 매력을 지닌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만남으로 도일출의 인생은 꼬여 버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26년 전 우연히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잡았던 나는 내가 무슨 엄청난 포커 고수인 줄 착각하고 겁 없이 덤볐다가 한 달 치 아르바이트비를 모두 잃었었다. 그래서일까? 겁 없이 마돈나의 애인인 이상무(윤제문)에게 덤벼드는 도일출의 객기가 이해되었다. 26년 전의 나처럼 도일출 역시 자신의 실력을 과신했고, 그러한 과신은 이성을 잃게 만들었으며, 결국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만약 애꾸(류승범)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얼치기 도박꾼으로 철저하게 망가진채 끝났을 것이다.

애꾸는 짝귀에게 빚이 있었다며 도일출을 구해준다. 그리고 다시는 도박을 하지 말라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한다. 그것이 도일출에겐 첫 번째 기회였다. 도박에 손을 떼고 제대로된 삶을 사는 기회.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도일출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았고, 결국 애꾸의 팀에 합류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상상할 수도 없이 가혹한 인생의 수업료를 지불하게 된다.

​

​

​

케이퍼 무비의 재미까지 끌어들이다.

​

​

일단 도일출이라는 캐릭터가 공감이 되니 [타짜 : 원 아이드 잭]에 제대로 이입되었습니다. 내가 소심한 성격이 아니라면, 내가 도일출처럼 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면, 어쩌면 나도 더 비싼 인생의 수업료를 지불했을지도 모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도일출이 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기를 응원하며 영화에 푹 빠졌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일출은 점점 수렁 깊은 곳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도일출이 깊은 수렁으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타짜 : 원 아이드 잭]은 새로운 영화적 재미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케이퍼 무비의 팀플레이이다. [오션스 일레븐]의 성공 이후 여러 범죄자들이 팀을 이루어 큰 판을 설계한다는 설정은 꽤 여러 영화에서 차용되었다. 특히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 연출한 천만 영화 [도둑들]은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쿠키영상에서 최동훈 감독을 특별출연시켰을 정도로 [타짜]에 대한 오마주를 드러낸 권오광 감독은 애꾸를 리더로 '타짜' 드림팀을 이루며 [도둑들]의 케이퍼 무비 방식도 차용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애꾸는 도일출을 시작으로 '타짜'들을 불러 모으는데, 노련한 고수 권원장(권해효), 미모와 섹시함으로 남다른 연기력을 발휘하는 영미(임지연), 셔플의 제왕인 까치(이광수)까지. 그들은 각자의 특기를 발휘하여 돈밖에 모르는 지방 졸부 돌영감(우현)의 돈 50억 빼돌리기 작전에 돌입한다. 케이퍼 무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이 돋보여야 하는데, [타짜 : 원 아이드 잭]은 이를 충실히 수행하며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

​

​

도일출의 좌절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이후 스포 포함)

​

​

이광수 특유의 코믹 연기와 임지연의 푼수끼 가득한 연기가 더해지며 [타짜 : 원 아이드 잭]의 재미는 점점 상승 곡선을 그려 나간다. 이제 계획대로 돌영감의 돈을 빼돌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 그런데 바로 그때 마돈나가 도일출의 앞에 나타난다. 이미 마돈나에 홀려 이상무에게 혼쭐이 난 경험이 있는 도일출은 또다시 마돈나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러한 도일출의 약점은 애꾸의 팀에 치명적인 실패를 안겨준다.

또다시 마돈나에 의해 쓴맛을 맛본 도일출은 결과적으로 팀을 위험에 빠뜨린 배신자가 된다. 나는 바로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최고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부분에서 영화가 끝났다고 해도 내겐 굉장히 깊은 여운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 어찌 되었건 도일출의 복수로 영화가 끝나야 함은 당연하다. 게다가 도일출은 두 번이나 좌절을 안겨준 이상무가 아버지인 짝귀를 죽인 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복수는 어쩔 수 없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가 되어 버렸다. 문제는 바로 마귀를 향한 도일출의 복수가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는 점이다.

문제의 시작은 애꾸의 죽음에서부터이다. 영화 후반부 도일출의 복수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꾸의 자연스러운 퇴장이 필요했던 듯 한데, 그래도 중반까지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던 애꾸가 별다른 장면 없이 그냥 죽은 것으로 처리된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이제 도일출은 혈혈단신으로 복수를 해야 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애꾸의 죽음에 대한, 그에겐 더 이상 팀이 없다. 그렇기에 도일출의 복수에는 더욱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혀 치밀해 보이지 않는다.

​

​

​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냐?

​

​

마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도일출의 계획은 간단하다. 도박판에서는 상대방을 제외하고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애꾸의 가르침대로 돌영감과 마돈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마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돌영감과 마돈나가 순순히 도일출의 편이 되어줄까? 돈밖에 모르는 돌영감의 입장에서는 굳이 무일푼인 도일출의 편이 될 필요가 없고, 이미 두 번이나 도일출을 함정에 빠뜨린 마돈나 역시 도일출의 계획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건 애초에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다.

하지만 영화이다 보니 돌영감과 마돈나는 도일출의 계획대로 정확하게 움직인다.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냐?"라는 도일출의 대사는 권오광 감독이 생각해도 도일출의 계획이 너무 무리였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문제는 또 있다. 영화 마지막에 40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일 것이라면 도대체 뭐 하러 포커판을 벌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냥 칼싸움으로 모두 죽이고 돈을 챙기면 되는 것 아닐까? 마치 포커판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자리인 듯 행동하다가, 포커판이 끝나자 돈을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꼴이 우스꽝스럽다. 도일출의 복수 장면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마귀의 손목을 잘라버리고 피투성이가 되는 마돈나의 섬뜩한 모습뿐이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원래 도박이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거다." 이 대사는 [타짜 : 원 아이드 잭]에도 적용된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포커를 소재로 개성 강한 캐릭터를 내세운 케이퍼 무비의 색다른 재미까지 잡아낸 [타짜 : 원 아이드 잭]. 도일출이 마돈나의 꾐에 넘어가 좌절하는 순간 영화의 재미는 절정에 올랐다. 포커로 따진다면 이제 히든카드만 제대로 들어오면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되고, 꼭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아니더라도 플러쉬나 스트레이트까지도 가능하다. 그런데 마지막 히든이 너무 엉망으로 들어와 원페어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나도 포커를 하며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다. 이때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타짜 : 원 아이드 잭]을 보며 "아! 히든카드만 제대로 들어왔다면..."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 원래 도박이란 이런 것이다. 마지막 전부 잃고 나서의 허무함, [타짜 : 원 아이드 잭]이 그러한 허무함을 느끼게 해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