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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정지우

주연 : 김고은, 정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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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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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기간 동안 이틀 연속 [분노의 질주 : 홉스 & 쇼]와 [봉오동 전투]를 본 이후 거의 2주가 지나도록 나의 극장 출입은 끊겼다. 특별히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지만 나의 모든 의욕을 무기력하게 꺾어버린 무더위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무더위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와 함께 한 풀 꺾였던 목요일, 2주간의 무기력증을 깨고 나와 아내는 퇴근 후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우리 부부의 선택은 [유열의 음악앨범]이다.

내가 한 여름의 무기력증을 털어내는 영화로 [유열의 음악앨범]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달달한 멜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중년의 나이가 되고 나니 20대 시절 느꼈던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아직 내 감수성이 완전히 말리 비틀어진 것은 아니기에 이렇게 달달한 멜로 영화를 보고 나면 아내와 처음 만났던 그때의 설렘을 다시금 느낄 수가 있다. 아내 역시도 그렇기에 회사일로 지친 목요일 저녁에 [유열의 음악앨범]을 보자는 내 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비록 정해인이 잘 생겨서라고 말하긴 했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가 처음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던 그 시절의 풍경은 내게도 너무나 익숙하다. 나 역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설레고, IMF라는 국가적 고난에 좌절하고, 그 좌절을 뚫고 일어서 지금까지 오지 않았던가. 과연 정지우 감독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그 시절의 분위기를 얼마나 공감되게 잡아냈을까? [유열의 음악앨범]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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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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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의 시작은 1994년 10월 1일이다. 그날은 가수 유열이 라디오 DJ를 처음 진행한 날이다. 여느 날과도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였던 그날 엄마가 남겨준 빵집에서 일하던 미수에게 현우가 찾아온다. 다짜고짜 콩으로 만든 빵을 요구하는 현우에게 미수는 근처 슈퍼마켓에 가보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별것 아닌 것 같았던 그날의 미수와 현우의 첫 만남은 이후 11년간 두 사람을 연결하는 끈이 되어 결국 하나로 이어준다.

솔직히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유열의 음악앨범'인지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초반의 설정을 보니 알겠더라. 누군가에겐 그저 '어! 유열이 라디오 DJ를 맡았네.'라며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지만 현우에겐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기적이다.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소년원 생활을 했던 현우는 소년원을 나가는 날 무엇 하나라도 세상이 변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고, 현우가 소년원을 나온 그날 유열이 라디오 DJ를 처음 맡으며 그의 소망을 이루어진 것이다. 남들에겐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할 수 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러한 사소하지만 특별한 기적을 의미한다.

1994년은 나에게도 특별하다. 그 해는 나에게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건은 대학 입학이다. 상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하며 스스로 대학 입학을 포기했던 나는 1년간 직장을 다니며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졸이 받아야 할 차별을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1년간 입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한 끝에 서울의 2년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미수와 현우는 1975년 생이라고 밝히는데 1975년 생은 나와 함께 대학을 입학했던 세대이기에 반가웠다. (비록 미수는 빠른 75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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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설렘과 이별의 아픔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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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여름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그것이 1994년 나에게 벌어진 두 번째 큰 사건이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농촌활동을 다녀온 내게 어머니께서 내민 입대 영장은 나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이제 겨우 대학생활의 낭만을 본격적으로 느낄 참이었는데, 게다가 농촌활동을 하며 만난 다른 과 여성에게 사귀고 싶다는 고백을 난생처음 받아봤는데, 입대 영장은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결국 1994년의 나는 대학 입학이라는 설렘과 군 입대라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던 아주 특별한 해였다.

미수와 현우도 마찬가지이다. 1994년 10월 1일 그들은 처음 만났다. 현우를 본 미수는 처음엔 무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우에게 미수의 빵집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시작점과도 같았다. 그곳에서 자신이 소망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시작된 미수와 현우의 만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한 남녀 간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내게 고백한 그녀와 연애를 채 시작하기도 전에 군대에 끌려가야 했던 나처럼, 현우에겐 아직 끊어내지 못한 과거의 그늘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별을 하게 된다.

이후 영화의 배경이 1997년으로 바뀐 것 역시 내겐 의미심장하다. 1997년은 IMF라는 사상 초유의 경제 재난이 대한민국을 덮쳤던 해이다. 그 해 미수는 졸업을 한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1997년의 막막함을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래도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대학 졸업 후 청년 실업자 신세였던 나는 자존감이 지하 끝까지 떨어졌고, 3개월간의 공공 근로를 하며 근근이 용돈이나 벌어 쓰고 있었다. 그리고 사정은 미수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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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사람에겐 세상도 후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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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에서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후벼팠던 대사는 후진 사람에겐 세상도 후져 보인다는 미수의 절망적인 푸념이다. 정말 그렇다. 1997년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하고 공공 근로로 생활하던 나는 이 후진 세상에 전쟁이라도 벌어져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창피하지만 그땐 그랬다. 내가 너무 후져서 세상도 후져 보였던 것이다.

1997년 미수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서 연봉 1,500만원을 받으며 일을 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그 시절엔 사치였다. 한 달에 100만원 남짓 버는 것도 당시로서는 고마워해야 했다. (나는 공공 근로를 하며 한 달에 50만원 정도를 벌었고, 그나마도 3개월 일하면 1개월은 공공 근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현우. 미수는 용기를 내서 현우에게 다가가지만, 현우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그 장면에서 1994년 여름의 내가 생각나서 울컥했다.

미수가 만들어준 현우의 천리안 메일, 하지만 실수로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의 인연은 자꾸만 어긋난다. 요즘이라면 핸드폰 번호만 알면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었을 테지만, 당시에는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현우에겐 이메일이 거의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다. 현우가 우여곡절 끝에 이메일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미수와 연락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후진 세상 탓에 현우는 또다시 사건에 휘말리고, 자신의 후진 상황 때문에 미수 역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미수의 그런 선택이 너무 이해가 된다. 나의 후진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것이 IMF가 가져온 후진 세상을 살던 후진 우리들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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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희망이 드디어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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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은 1994년 10월에 시작하여 1997년 IMF라는 절망의 시대를 넘어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거친다. 그리고 2005년,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은 편의점이 되고, 작은 집들이 하나씩 모여 거대한 아파트로 무한 증식하던 시절, 후진 세상에서도 제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미수와 현우는 다시 만난다. 미수는 작은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었고, 현우는 영상 디렉터로서의 꿈을 키워나가는 시점이다. 그들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미수가 편집한 책이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현우는 '유열의 음악앨범' 보이는 라디오의 영상 디렉터를 맡게 되지만, 그것은 성공이 아닌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가까웠다.

2005년의 나는 어땠던가. 2003년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후진 내 인생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월급날 통장에 들어오는 실수령액은 150만원 정도였고, 그나마도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밀리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더 안정적인 회사를 찾아 잦은 이직을 해야 했다. 그리고 2005년 즈음 내가 그토록 원하던 월급 꼬박꼬박 주는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갔다. 물론 수시로 욕설을 내뱉으며 내 인격을 모욕하는 회사 상사와의 갈등으로 2007년 퇴직을 했지만 확실히 2005년에 들어간 회사 덕분에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은 조금씩 나아졌다. IMF 이후 후진 인생을 살아오던 내게도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아내는 '과연 이게 해피엔딩일까?'라고 묻는다. 미수와 현우는 우여곡절 끝에 방송국 앞에서 재회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과연 행복하게 잘 이루어질까? 여전히 미수에겐 조건이 더 좋은 출판사 사장 종우(박해준)의 구애가 계속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미수는 출판사를 관두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우는 '유열의 음악앨범' 영상 디렉터 일을 시작하지만 아직은 임시직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우의 아픈 과거가 여전히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현우는 유족에게 용서를 받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더 이상 그들의 인생은 후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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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지마, 뛰지마 현우야, 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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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조금 아쉬웠던 점은 희망을 넘어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유열의 음악앨범'은 2007년 4월 15일까지 라디오 전파를 탔으니 [유열의 음악앨범] 또한 2005년에서 끝내지 말고 2007년 미수와 현우의 사랑이 완벽하게 해피엔딩이 되는 순간을 담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내 인생의 전환점도 2007년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하면서 였으니 그랬다면 나는 더욱더 행복한 기분으로 극장 밖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열의 음악앨범]은 묘하게도 내 인생의 굴곡과 맞닿아 있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군대에 갔던 1994년부터 시작하여, IMF로 힘들어했던 1997년을 거쳐 결혼 후 내 인생에도 희망이 보였던 2005년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내 인생을 투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렇기에 이 영화에 대한 내 감정이 더욱 애틋해졌나 보다. 영화에서 흘러나온 그 당시의 음악들은 나 역시도 즐겨 듣던 음악이었고, 거리의 풍경 또한 타임머신을 타고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정겨웠으니까...

[유열의 음악앨범]은 요즘의 영화들과 비교해서 지나칠 정도로 잔잔하다. 미수와 현우의 사랑에 가슴 아픈 시련이 오고, 강력한 방해꾼이 나타날 법도 한데 정지우 감독은 그런 자극적인 스토리 진행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그저 그 시절의 공기에 자연스럽게 영화를 맡긴다. 마치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현우에게 '뛰지마, 뛰지마 현우야. 다쳐'라며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선언하던 미수의 애틋한 모습처럼, 이 영화는 결코 뛰지 않고 천천히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래, 뛰지 않아도 괜찮다. 진심을 느낄 수만 있다면 천천히 걸어오는 너를 나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나는 [유열의 음악앨범]은 보며 젊은 시절 풋풋했던 설렘을 느끼며 극장 밖을 나섰다. 아내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래서 더욱 뜻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