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독 : 조철현

주연 :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

​

역사왜곡이라는 민감을 논란 속에서...

​

​

여름 대목, 한국 영화의 첫 포문을 연 영화는 [나랏말싸미]이다. [나랏말싸미]는 흥행력과 연기력을 모두 겸비한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고,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인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송강호는 [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로 이미 천만 배우에 등극했으며, 올해에도 [기생충]으로 천만 관객 티켓 파워를 과시한 바 있다.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명량]이 2014년 7월에 개봉해서 1천7백6십만이라는 전무후무한 흥행 대기록을 세워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고의 흥행 영화로 우뚝 서있음을 감안한다면 송강호와 세종대왕의 조합을 선보인 [나랏말싸미]의 못해도 천만이라는 장담이 허언처럼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랏말싸미]는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영화 개봉 전부터 소설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평전>과 표절 시비로 시달렸고, 상영 금지 가처분 소송이 기각되며 한시름 놓을 시점에서 영화의 주연을 맡은 전미선이 갑작스럽게 자살이라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로 인하여 [나랏말싸미]는 홍보를 최대한으로 자제하며 전미선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영화 개봉 후에 벌어졌다. 바로 역사왜곡 문제이다.

[나랏말싸미]를 보기 전부터 한글을 세종대왕(송강호)가 아닌 신미 스님(박해일)이 주도하에 만들었다는 영화의 내용은 큰 화제가 되었다. [나랏말싸미]의 제작사는 한글 창제의 여러 설 중 하나를 극화한 것이라며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못해도 천만이라던 이 영화는 개봉 첫 날인 24일 수요일에만 일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을 뿐,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라이온 킹]에 밀려 2위를, 일요일에는 [알라딘]에게까지 밀리며 3위로 떨어졌다. 이제 [나랏말싸미]는 천만은커녕 100만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과연 이 영화는 이렇게 대중의 집중포화를 맞을 정도로 역사왜곡 문제가 심각한 영화일까? [나랏말싸미]를 보러 가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

​

​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덧붙이면...

​

​

솔직히 논란이 되는 영화는 마음 편하게 영화 보기가 어렵다. 영화를 보고 나면 어찌 되었건 내 의견을 글로 표현을 해야 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내 글이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공격을 받게 되면 유리 멘탈인 나로서는 반론을 제시하다가 지쳐버린다. 그렇다고 내 의견이 아닌, 남의 의견을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들은 악플은 그냥 무시하라고 하는데, 20년 동안 영화 홈페이지, 영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도 그게 잘 안된다. [나랏말싸미]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난 여론이 크기에 나 역시도 마음 편하게 여론에 기대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일반적인 성향이 아닌가 보다.

내가 이렇게 변명 비스무리한 글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나랏말싸미]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학교에서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배웠고, 그렇기에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나랏말싸미]의 내용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새로웠다. 만약 [나랏말싸미]가 내가 아는 것 그대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을 담았다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영화가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어쩌면?'이라는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다. 수많은 역사 영화들이 그렇지 않았던가? 한 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경우도 광해군이라는 실존 인물을 내세워 넣고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라는 광해군 8년 2월 28일 일기에 남겨진 글귀를 토대로 하선(이병헌)이라는 광대를 만들어냈다. 하선이 광해군을 대신해 15일간 왕 노릇을 했다는 영화의 내용은 실제 일어났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지만 아무도 역사왜곡이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유독 [나랏말싸미]에만 역사왜곡 논란이 뒤따르는 것일까?

​

​

​

누가 감히 세종대왕을 건드려.

​

​

아마도 [나랏말싸미]가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대상이 하필 세종대왕이었기 때문이리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만약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이 이순신 장군이 아니고, 사실은 이름 모를 장수였다는 내용의 영화가 나온다면 아마도 나 역시 심각한 역사 왜곡에 분노를 했을 것이다. 영화적 상상력에 아무리 제한이 없더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나랏말싸미]의 역사 왜곡 논란은 과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나?라는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영화의 내용을 천천히 되짚어 보자.

[나랏말싸미]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초기이다. 불교가 득세했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 즉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을 세운 이들 입장에서 고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교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생각은 달랐다.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불자가 모든 지식을 독점했고 그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며, 유자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깨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들과 지식을 공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자보다는 쉬운 새 문자가 필요했다.

당연히 기득권 세력인 유자들은 반발했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보니 명나라와 다른, 조선만의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유학자임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문자를 만들려는 세종대왕의 뜻을 집현전 학자들이 순순히 받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랏말싸미]의 시작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유학자인 집현전 학자들은 반대했다. 그렇다면 누가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을 창제한 것일까?

​

​

​

소헌왕후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

​

​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에서 불자는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실제 조선 역사를 들여다보면 세종대왕은 1448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복궁 문소전에 불당을 세웠다. 당연히 신하들은 극렬하게 반대를 했다. 급기야 집현전 학자들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조정 대신들도 이에 따랐으며, 성균관의 학생들마저도 집단적으로 수업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이에 맞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며 50일간 궁궐로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신하들은 세종대왕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나랏말싸미]의 기둥이 된다.

[나랏말싸미]에서 세종대왕과 신미 스님을 연결해 준 것은 소헌왕후이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일본에 양도하라는 일본 불자들의 성화에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세종대왕은 신미 스님의 활약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이 장면은 굉장히 속 시원했다.) 신미 스님을 통해 불경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어를 접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실마리를 풀게 된다. 그리고 신미 스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만약 소헌왕후가 독실한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만약 소헌왕후에 대한 세종대왕이 사랑이 깊지 않았다면 [나랏말싸미]의 이야기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소헌왕후는 세종대왕에게 신미 스님을 소개해 줌과 동시에 세종 대왕이 한글 창제의 대업을 마무리 짓도록 끝까지 내조한다. 결국 [나랏말싸미]는 소헌왕후에 대한 세종대왕이 사랑을 담보로 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랏말싸미]의 진정한 주인공은 세종대왕도, 신미 스님도 아닌 소헌왕후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문자인 언문(한글) 발표를 두고 갈등을 빚은 세종대왕과 신미 스님은 소헌왕후의 죽음으로 한발씩 양보하며 뜻을 함께 하게 된다. 나는 그 장면이 한글을 완성하는 장면보다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

​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

​

한글 창제라는 세종대왕의 업적은 누가 뭐래도 왜곡할 수가 없다. 실제로 신미 스님의 주도하에 한글이 창제되었다고 하더라도 세종대왕의 의지가 없었다면 한글은 결코 조선 백성의 것이 되지 못했을 테니까. 단지 [나랏말싸미]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한글 창제라는 대업에서 세종대왕의 역할이 너무 미미했다는 점이다. 신미 스님 일행과 두 대군인 수양(차래형), 안평(윤정일)이 새로운 문자 만들기에 몰두하는 동안 세종대왕은 신하들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처럼 표현되었다. 이 부분에서 조철현 감독은 세종대왕에 대한 국민적 정서를 좀 더 영화에 반영했어야 했다. 어차피 [나랏말싸미]는 순익분기점이 350만인 한국형 블록버스터이기에, 조철현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서 좀 더 관객의 입맛을 조율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그의 최대 실수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랏말싸미]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이 영화가 위인 세종대왕이 아닌, 인간적인 세종대왕을 그렸다는 점이다. 1996년 11월부터 1998년 5월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유동근)은 기행을 일삼는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민우)이 아닌 셋째 아들 충녕대군(안재모)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충녕대군의 장인인 심온을 축출한다. 내가 <용의 눈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인데, [나랏말싸미]에서 소헌왕후는 자신의 역적의 딸이라 신미 스님에게 소개하고, 왕위에 관심이 없던 충녕대군으로 하여금 세자 책봉을 받아들이도록 이끈 것이 자신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오래전에 TV에서 본 <용의 눈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결국 [나랏말싸미]는 비정한 권력의 중심에 선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절절한 사랑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지아비를 왕으로 만드는 대신 친정 식구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했던 소헌왕후의 눈물, 그러한 소헌왕후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세종대왕의 한숨, 두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목욕을 하며 장난을 치는 장면은 [나랏말싸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결국 내게 있어서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라는 세종대왕의 업적보다는 소헌왕후와의 사랑이라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세종대왕의 사랑꾼으로서의 모습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