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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로만 폴란스키

주연 : 엠마누엘 자이그너, 에바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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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고 : 이 글은 스포 덩어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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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스릴러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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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라는 장르는 참 매력적이다. 영화와 관객 간의 팽팽한 두뇌 싸움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영화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영화 중간의 단서를 놓치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패배를 맛보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패배를 당한다고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잘 만든 스릴러 영화는 관객에게 기분 좋은 패배를 안겨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릴러 영화를 볼 때마다 기분 좋은 패배를 기대한다.

[실화 : 숨겨진 비밀]은 심리 스릴러를 표방한 영화이다. 감독은 유럽의 거장 로만 폴란스키이다. 그는 비록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지만,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었고, 광신도 맨슨 일당에 의해 만삭의 아내를 잃은 충격적인 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항상 어둡고 기괴하다. 내가 [실화 : 숨겨진 비밀]을 기대한 이유는 그러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성향이 심리 스릴러 장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연 배우는 에바 그린이다. 데뷔작 [몽상가들]에서부터 내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은 신비한 매력을 지닌 프랑스 여배우의 존재는 [실화 : 숨겨진 비밀]의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그리고 [실화 : 숨겨진 비밀]은 2010년에 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유령 작가]와도 오버랩되었다. [유령 작가]는 필명이 고스트(이완 백그리거)인 대필 작가가 전 영국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쓰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다룬 스릴러 영화로, [실화 : 숨겨진 비밀]의 미스터리한 매력을 지닌 L(에바 그린)의 직업이 대필 작가임을 감안한다면 참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이런 기대들이 맞물려 월요일 저녁 [실화 : 숨겨진 비밀]을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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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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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실화 : 숨겨진 비밀]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들은 스펙터클한 액션과 자극적인 장면들을 통해 관객의 눈을 현혹시키고, 온갖 현란한 트릭을 이용해서 관객을 속이려 든다. 하지만 [실화 : 숨겨진 비밀]은 그런 것 전혀 없이 그냥 잔잔하게 베스트셀러 작가 델핀 다리유(엠마누엘 자이그너)와 대필 작가 L의 관계에 집중한다.

팬 사인회와 출판사 사장과의 미팅 등으로 지칠 대로 지친 델핀은 의문의 여성 L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가까워진다. 그때쯤 델핀에겐 의문의 협박 편지가 오기 시작했고, 연인 프랑수아(뱅상 빼레)는 미국으로 출장을 가서 외톨이가 되자 델핀은 L과 한시적인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L은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델핀의 사생활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실화 : 숨겨진 비밀]의 하이라이트는 델핀이 L의 이야기를 토대로 자신의 다음 작품을 쓰기로 다짐하면서부터이다. 글을 쓰기 위해 외딴 별장에 함께 간 델핀과 L. 그런데 그때부터 델핀은 서서히 아프기 시작한다. L이 델핀의 음식에 쥐약을 조금씩 넣었던 것. 델핀은 가까스로 L에게서 도망쳐 구조되지만 아무도 L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델핀이 결코 쓴 적이 없는 신작 소설이 출판사에 배달된 것이다. 과연 어떻게 된 영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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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복선은 충분히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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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 숨겨진 비밀]을 본 후 나 역시 L의 존재가 조금 헷갈렸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영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은 두 개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해석은 L은 델핀의 스토커이고, 델핀을 대신해서 델핀의 새로운 소설을 쓴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L의 직업이 대필 작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없었던 L은 델핀의 명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출판했고, 델핀의 뒤에서 소설의 성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해석보다는 L이 델핀의 또 다른 자아라는 두 번째 해석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L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의심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델핀과 L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제3의 인물이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카페 등에서도 카페 종업원은 L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영화 중반 L이 델핀과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장면, 고등학교 행사에 L이 델핀 대신 참가했지만 고등학교 교사는 델핀이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며 원망하는 장면, 델핀은 L과 프랑수아가 통화하는 것을 들었지만 프랑수아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 장면 등등... L이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라는 복선은 영화에서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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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L을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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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이 가족에게서 받은 듯한 협박 편지 내용은 델핀이 어머니의 죽음을 소설의 소재로 이용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비난하는 내용이 있었다. 결국 델핀의 첫 번째 소설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델핀은 소설가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델핀이 새로운 소설을 더 이상 쓰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이유는 더 이상 글로 옮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델핀은 L을 만난다. 하지만 L의 어머니가 델핀과 마찬가지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로 비춰보아 L은 곧 델핀의 또 다른 자아인 셈이다. L은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가상의 친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L이 말한 가상의 친구는 곧 델핀이 만든 L을 뜻하는 것이리라. 결국 델핀은 L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었고, L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것을 간접 체험했으며, 그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실화'라는 것은 결국 델핀이 상상 속에 겪은 가상의 경험이다. 그렇기에 부재가 '숨겨진 비밀'이 붙은 것은 아닐까? 국내 포스터는 더 노골적으로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붙어있는 L과 델핀을 보여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해석이다. 솔직히 [실화 : 숨겨진 비밀]은 그다지 재미있는 스릴러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가 끝난 후 이렇게 L의 정체를 곱씹어 보는 재미만큼은 충분했던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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