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독 : 조민호

주연 : 고아성, 류경수

​

​

너무 가벼운 영화를 봤으니 이제 너무 무거운 영화도 보자.

​

​

전날 [해피타임 스파이]를 보고 나서 살짝 충격을 받았다. 물론 어느 정도는 병맛 섹스 코미디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해피타임 스파이]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고, 선을 마구 넘어버리는 영화의 수위에 유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2004년 꼭두각시 인형으로 병맛 액션 섹스 코미디를 완성한 [팀 아메리카]를 본 후, 더러운 기분을 느낀 것과 같았다. 이렇게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해피타임 스파이]를 봤더니 이번엔 조금 묵직한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항거 : 유관순 이야기]이다.

사실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지난 2월 27일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는 것이 마땅한 영화였다. 당시 우리 가족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개봉한 [항거 : 유관순 이야기]와 [자전차왕 엄복동]을 두고 고민을 했었는데, 결국 [자전차왕 엄복동]은 관객 평가가 워낙 안 좋아 포기했고,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너무 묵직한 이야기가 부담스러워 차일피일 미루다가 극장에서 놓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해피타임 스파이] 덕분에 이제 [항거 : 유관순 이야기]의 묵직함을 맞이할 시간이 된 것이다.

참 이상하다. 불과 3년 전 [동주]가 개봉했을 때만 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시절 시인 윤동주의 고난을 담은 [동주]를 보는 것이 그렇게 꺼려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항거 : 유관순 이야기]를 보는 것은 그토록 주저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이유를 영화의 첫 장면부터 알게 되었다.

​

​

​

[동주]와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비슷한 듯, 다르다.

​

​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두 달에 걸쳐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하여 7천5백 명이 살해당하고, 4만7천 명의 체포되었다는 가슴 아픈 자막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곧바로 서대문 교도소에 끌려오는 유관순(고아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유관순이 서대문 교도소에 끌려오기 전 가족과의 단란했던 모습을 잠시 비춰주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이다. 1시간 45분 동안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오로지 서대문 교도소에서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도 결코 그 뜻을 굽히지 않는 유관순의 강인함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그러한 점이 [동주]과 [항거 : 유관순 이야기]의 차이이다. [동주]는 시인을 꿈꾸는 청년 윤동주(강하늘)와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송몽규(박정민)의 우정으로 시작하여 그들이 일제 강점기라는 비극의 시대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꿈꾼 독립운동을 보여준다. 결국 [동주]에는 스토리가 있고, 캐릭터가 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캐릭터를 따라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윤동주가 맞이하는 비극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와는 달리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스토리도, 캐릭터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용은 3.1 만세운동으로 서대문 교도소에 갇힌 유관순을 비롯한 여러 여성들이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교도소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전부이다시피하다. 캐릭터도 없다. 물론 유관순이 있고, 교도소에 여러 여성들이 있지만, 영화는 그들의 캐릭터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일제 강점기 시절을 살았던 평범한 여성을 대표할 뿐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며 느껴지는 묵직함이 [동주]보다 훨씬 무겁다.

​

​

​

묵직함이 남다르다.

​

​

[동주]는 재미있었다. 캐릭터 구축은 완벽했고, 그렇게 구축된 캐릭터에 의한 스토리 전개는 훌륭했다. 그런 영화적 완성도는 자연스럽게 감동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동주]의 영화적 재미이다. 하지만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결코 재미로 보는 영화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잊고 있었던 3.1 만세 운동의 묵직함을 다시 상기시키는 역할에 충실한 영화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 45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딴짓을 하지 않고 화장실도 참아가며 영화에 몰입했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볼 때 영화가 지루하면 한, 두 번 정도 영화를 일시정지시켜놓고 잠시 딴짓을 하다가 영화를 봤는데,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며 딴짓을 하면 유관순을 비롯한 목숨을 걸고 3.1 만세 운동을 했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영화의 묵직함은 남다르다.

유관순은 구타로 인한 방광 및 자궁파열로 출소 이틀 전, 1920년 9월 28일 사망했다고 한다. 유관순의 시신은 몰래 화장시키기 위해 석유통에 넣어졌으나 이 사실을 안 이화학당 측의 요구로 가까스로 인도되었고,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39년 일제가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하며 결국 유실되었다는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흐르고 나면 묵직함은 일제에 대한 분노로 변환된다. 그들은 그렇게 열일곱에 불과한 소녀를 죽어서까지 철저하게 짓밟았다.

​

​

​

일제 강점기 시절의 그들

​

​

물론 [항거 : 유관순 이야기]가 서대문 교도소에서 당한 유관순의 고난만을 담은 것은 아니다. 조선인이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위해 개명을 하고 서대문 교도소 보안과장(이성원)을 도와 유관순 고문에 가담한 정춘영(류경수)를 통해 일제 강점기 시절을 살아간 두 부류의 사람을 보여준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영화에서 정춘영은 그렇게 나쁜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그저 살고 싶었고,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보안과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는 만세 운동을 위해 목숨을 거는 유관순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존심을 버리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런 정춘영에게 유관순은 따끔하게 한마디 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자유, 그것이야말로 진정 사는 것이라고...

해방 후 정춘영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유관순을 고문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위원회가 강제해산되면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자막을 보며 나는 분노보다는 측은함이 느껴졌다. 영화가 정춘영을 악독한 일제 앞잡이로 그렸다면 마지막 자막에 분노했을 텐데, 아마도 조민호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유관순과 정춘영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전차왕 엄복동]의 사카모토(김희원)과는 완전 다른...) 내가 만약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선택했을까?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유관순의 삶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 정춘영의 삶. 이런 생각을 하니 그 암울했던 시절을 살다간 모든 사람들이 그저 가엽게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