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타임 스파이] - 하필 나의 첫 '머펫' 영화가 이 영화라니...
감독 : 브라이언 핸슨
주연 : 멜리사 맥카시, 엘리자베스 뱅크스
더빙 : 빌 바레타, 도리엔 데이비스
어린 시절 추억이 살짝 담긴 <머펫 쇼>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TV 채널 중 미국 방송이 따로 있었다. 그중에서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들이 당시의 나로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주말 아침이면 별생각 없이 그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들을 '머펫'이라고 부르더라. 그리고 내가 봤던 프로그램의 제목은 <머펫 쇼>였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머펫 쇼>는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방영된 인형 버라이어티 코미디 쇼라고 한다. 짐 핸슨이 고안한 인형 '머펫'들이 미국의 유명 가수, 배우와 얽힌 구성으로 1978년 에미상 버라이어티 부문 작품상을 수상할 정도로 당시 미국에선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머펫 쇼>의 인기로 인하여 '머펫'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도 꽤 많이 개봉되었는데, 1979년 북미에서 개봉한 [머펫 무비]는 북미에서만 6천5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머펫'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은 2011년에 북미에서 개봉한 [머펫 대소동]으로 북미에서 8천8백만 달러, 월드 와이드 성적은 1억6천5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국내에서 '머펫'은 그다지 인기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하긴 나만 하더라도 <머펫 쇼>를 미국 방송에서 띄엄띄엄 봤기 때문 큰 애정은 없다. 그렇기에 '머펫'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역시 우리나라에선 거의 개봉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1001편'에 선정된 [머펫 무비]는 개봉조차 하지 못했고, 북미에서 흥행 성공한 [머펫 대소동]은 2012년 5월 18일 국내 개봉했지만 1개 관에서 하루 상영횟수 최대 2회를 기록하며 1,495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해피타임 스파이]가 '머펫'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중 가장 성대하게 국내 개봉한 영화인 셈이다.
하필 나의 첫 '머펫' 영화가 이 영화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규모로 개봉한 '머펫' 영화 [해피타임 스파이], 물론 그래봤자 지난 5월 23일에 개봉하여 하루 최대 스크린수 60개에 상영횟수는 95회에 불과하고, 누적 관객 수는 1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에 그쳤지만, [머펫 대소동]과 비교한다면 어마어마한 성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머펫'에 대한 우리나라 관객의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스파이], [고스트버스터즈]의 멜리사 맥카시가 주연을 맡은 덕분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내 제목도 [스파이]를 연상시키는 '해피타임 스파이'로 정한 것일지도... (원제는 '해피타임 머더'이다.)
솔직히 2012년 [머펫 대소동]이 개봉했을 때 나는 관심이 있었다. [마법에 걸린 사랑]을 본 이후 에이미 아담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머펫'들 속에서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언제 개봉했는지도 모르게 극장가에서 사라졌고,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 지워져버렸다. 결국 내게도 첫 '머펫' 영화는 [해피타임 스파이]이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해피타임 스파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단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병맛 섹스 코미디 영화이며, 북미 흥행은 물론 비평에서도 처참한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곰 테드]처럼 유쾌한 코미디를 기대하며 [해피타임 스파이]를 봤고,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머펫 대소동]은 물론 앞으로 그 어떤 '머펫' 영화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 빠졌다. '머펫'을 볼 때마다 [해피타임 스파이] 속 엽기적인 섹스 장면이 떠오를 테니까...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가 떠올랐지만...
[해피타임 스파이]는 인간과 퍼펫이라 부르는 인형이 함께 사는 LA에서 퍼펫만 노리는 살인범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88년작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이다. 이 영화는 인간과 만화 캐릭터들이 함께 사는 도시에서 만화 캐릭터인 로져 래빗이 살인 누명을 쓰자 인간 탐정인 에디 발리언트(밥 호스킨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해피타임 스파이]도 비슷하다. 퍼펫 탐정 필립스(빌 바레타)는 과거 인기 있었던 TV 퍼펫 쇼 '해피타임 갱'에 출연했던 퍼펫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한때 경찰 파트너였지만 지금은 앙숙이 되어버린 에드워즈(멜리사 맥카시)와 함께 수사에 나선다. 하지만 수사를 하면 할수록 필립스는 점점 범인으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럴 때일수록 결국 의지가 되는 것은 에드워즈뿐. 둘은 힘을 합쳐 필립스에게 누명을 씌우고 퍼펫만 잔인하게 살해한 연쇄 살인마를 정체를 밝혀낸다.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를 재미있게 본 나로서는 스토리가 비슷한 [해피타임 스파이]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설정만 비슷할 뿐, 영화 자체는 완전히 서로 다르다.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는 만화 캐릭터와 인간의 적절한 조화, 그리고 짜임새 있는 스릴러 구조가 돋보이는 영화라면 [해피타임 스파이]는 막 나가는 19금에만 집착한다. 그런데 그런데 그 집착이 너무 과하다.
아무리 19금 섹스 코미디라도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
귀여운 인형을 내세워 19금 코미디를 완성한 것은 [해피타임 스파이]가 처음은 아니다. 세스 맥팔레인 감독의 2012년작 [19곰 테드]는 어린 시절 왕따를 당했던 소년 존(마크 월버그)과 존의 소원 덕분에 생명을 얻은 곰인형 테드(세스 맥팔레인)의 우정을 담고 있다. 존과 테드는 성인이 되어서도 우정을 이어나가는데, 문제는 테드가 겉모습은 귀여운 곰인형이지만 음담패설과 욕설을 일삼는다는 점이다. 이런 신선한 설정으로 [19곰 테드]는 흥행에 성공했고, 2015년에는 2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9곰 테드]가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위를 적절하게 조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피타임 스파이]는 그런 수위 조절은 가뿐히 무시한다. 영화 초반 '젖소 총각 뿜었네 2' 촬영 장면은 애교에 불과하다. 영화 중반 필립스와 산드라 화이트(도리엔 데이비스)의 섹스씬은 역겹기까지 하다. 사무실 사방에 튀기는 필립스의 정액이라니... 산드라 화이트가 [원초적 본능]의 그 유명한 장면을 흉내 내며 보라색 음모를 노골적으로 노출시키는 장면에서는 섹시하다는 느낌보다는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해피타임 스파이]에서 19금 노출은 스토리 전개를 위한 당위성과는 무관하다. 그냥 대놓고 막 나가는 것뿐이다. 물론 [19곰 테드]를 훌쩍 뛰어넘는 장면들은 분명 신선했다. 하지만 그 신선함이 영화적 재미와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70년대 인기 캐릭터인 '머펫'을 사정없이 망가뜨리면 재미있겠다는 단순한 망상만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장점을 좀 더 활용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해피타임 스파이]는 장점도 많은 영화이다. 특히 흑인 차별을 연상시키는 퍼펫 차별 장면은 이를 좀 더 발전시켰다면 단순한 섹스 코미디가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최초의 퍼펫 형사였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최후의 퍼펫 형사라는 불명예 주인공이 된 필립스의 캐릭터도 좋았다. 단지 퍼펫의 간을 이식받아 인간도, 퍼펫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 에드워즈 캐릭터는 조금 억지스럽다. 에드워즈의 캐릭터만 좀 더 다듬는다면 완벽한 버디무비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와 [19곰 테드]를 반쯤 섞은 듯한 [해피타임 스파이]의 기획은 높이 사고 싶다. 하지만 너무 [19곰 테드]보다 더 높은 수위를 보여줘야 한다는 집착은 결국 이 모든 장점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아무런 당위성도 없이, 너무 막 나가는 섹스 코미디로 전락하고 말았다. '머펫'에 대한 별 애정이 없는 내가 이 영화를 본 후 기분이 더러웠으니, 어렸을 적부터 <머펫 쇼>를 봤고, 이후로도 '머펫 무비'에 열광한 미국 관객 입장에서는 [해피타임 스파이]를 본 후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그건 상업 영화로써 패착이다.
[해피타임 스파이]를 본 후 한동안 잊고 있었던 [머펫 대소동]을 보려던 내 계획은 전면 취소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마지막 대사가 '젠장, 아직도 젖소 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젠장,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그 장면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래서 더 이상 '머펫'이 주인공인 영화를 볼 수 없다. 젠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