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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주연 : 올리비아 콜맨, 엠마 스톤, 레이첼 와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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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것 발품 좀 팔면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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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면 영화를 보기 위해 내 발이 바빠진다. 평상시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편하게 보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지 않는 영화는 극장 개봉이 끝난 후 집에서 편하게 보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2, 3월이면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해 집에서 먼 극장까지 일부러 발품을 판다. 이때가 바로 아카데미 시즌이기 때문이다.

1년 중 내가 보는 영화를 퍼센트로 계산해보면 한국 영화가 40%, 미국 영화가 50%, 일본 중국 유럽 등 기타 등등이 10%가 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내 영화제에 불과하지만 자연스럽게 내 관심을 끌어당긴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작들은 국제 영화제 수상작과는 달리 예술적인 부분보다는 상업적인 부분이 커서 영화를 보는 내게 부담도 주지 않는다. 물론 요즘은 상업적인 부분보다는 예술적인 부분에 조금 더 치우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2월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3월에는 수상작들을 보기에 바쁜데, 올해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은 대부분 이미 내가 본 영화들이라서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그래도 이번 주에 개봉한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를 보기 위해 멀티플렉스 극장 시간표를 일일이 확인했고, 퇴근 후 한참을 차를 몰아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가 상영하는 몇 안 되는 멀티플렉스에 도착했다. 이로써 아카데미 시즌 동안 내가 관람해야 할 영화 명단에 한 편이 또 지워졌다. 이제 [블랙클랜스맨], [바이스]등 명단에 남은 영화가 몇 편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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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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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이미 제75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올리비아 콜맨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역시 올리비아 콜맨이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수상에 대한 전망이 밝은 영화이다.

이 영화는 1702년 영국 여왕의 자리에 오른 후 1714년 사망하기까지 12년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앤(올리비아 콜맨) 여왕과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권력 암투를 벌이는 사라 재닝스(레이첼 와이즈),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의 이야기가 블랙 코미디풍으로 그려졌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절대적인데 확실히 변덕스러운 앤 여왕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가 압도적이고, 레이첼 와이즈와 엠마 스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내 예상으로는 최소한 올리비아 콜맨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은 거의 확정적이지 않을는지...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름은 여배우들보다는 감독인 요르고스 란티모스이다.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등 연출한 영화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한 유럽의 거장이다. 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중에서 [더 랍스터]만 봤는데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만 하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웃지 못할 블랙 코미디 영화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상상력이 독창적이지만, 결코 대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다시 말해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도 그렇게 만만하게 볼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볼 계획이 있다면 그 점은 꼭 유의하며 영화를 관람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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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여왕에 대해 내가 몰랐던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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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그중에서 앤 여왕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와 열일곱 명의 자식을 잃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고질병인 통풍을 안고 사는 여성이다. 비록 영국 여왕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랜 친구이자 권력의 실세인 사라 제닝스에게 응석을 부리고 은밀한 동성애에 푹 빠져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떻게 저런 천박한 여자가 여왕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를 보고 나서 앤 여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사실 나는 앤 여왕이 통치하던 시절의 영국은 히스테릭한 앤 여왕의 성격만큼이나 위태로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더라. 의외로 앤 여왕은 12년이라는 통치 기간 중에 (영화에서도 나왔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휘그와 토리 양당을 잘 견제하며 정당정치를 발달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707년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통합 왕국을 건설하는 큰 업적을 쌓았다고 한다.

분명 영화 속의 앤 여왕과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실제 앤 여왕의 이미지는 달랐다. 하지만 그 순간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더라. 사라를 몰아내고 앤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애비게일이 앤 여왕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토끼(앤 여왕은 죽은 열일곱 명의 자식들을 대신하여 열일곱 마리의 토끼를 키웠다.)를 발로 짓밟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에 취해 있을 때, 그동안 나약하게만 보였던 앤 여왕이 애비게일에게 다리를 주무르라며 애비게일의 머리를 짓눌러 버리는 장면. 처음엔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을 잘 몰랐는데, 앤 여왕의 실제 모습을 알고 나니 이 장면이 오싹해졌다. 어쩌면 애비게일이 사라를 쫓아낸 것이 아닌, 앤 여왕이 애비게일을 이용해서 사라와 사라의 남편이자 전쟁 영웅인 말버러(마크 게티스)를 축출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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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콜맨만 여우주연상에 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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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영화의 겉모습만 보면 이 영화는 영락없이 사라와 애비게일의 권력 다툼으로 보인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히스테릭한 허수아비 여왕에 불과한 앤을 독차지하기 위해 막장에 가까운 암투를 벌인다. 애비게일 입장에서는 사라만 쫓아내면 영국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라가 그동안 그래왔으니까.

만약 사라와 애비게일의 권력 다툼이 이 영화의 본질이라면 엠마 스톤과 레이첼 와이즈는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어야 했고, 앤 여왕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맨은 여우조연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영화에서의 비중도 앤 여왕과 비교해서 애비게일과 사라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말이다. 영화를 볼 땐 그것의 의미를 몰랐는데, 앤 여왕의 실제 행적을 알고 나니 그제서야 왜 올리비아 콜맨만 여우주연상에 오른 이유를 알겠더라.

앤 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프랑스와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이 길어지며 휘그당원인 말버러 장군이 전쟁의 주역으로 떠올랐고, 휘그당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사라는 프랑스와의 화친을 주장하는 토리당을 무시하고 계속 전쟁이 지속되길 바랐다. 그래야만 휘그당과 자신이 권력을 더욱 움켜쥘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에 영국 국민들은 지쳐갔고, 앤 여왕이 역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길 원했다. 하지만 휘그당이 장악한 의회는 앤 여왕의 뜻이 전쟁을 끝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트레흐트 강화 조약을 인준해주지 않으며 버텼다고 한다. 게다가 말버러는 앤 여왕에게 자신을 종신 대원수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앤 여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넘어서려 하는 말버러와 휘그당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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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앤 여왕의 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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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 역사에서 앤 여왕이 몰락한 귀족 출신의 하녀 애비게일을 이용해서 사라와 말버러를 축출했는지는 분명하지 없다. 그것은 정사라기보다는 야사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앤 여왕 입장에서 사라와 말버러는 더 이상 그녀의 친구이며 아군일 수가 없었다. 권력의 속성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감히 넘어서려 하는 자들은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적일 수밖에 없다. 앤 여왕은 사라와 말버러에게 아름답고 거대한 블렌하임 궁을 새로 건축해 하사할 정도로 애정이 깊었지만(이 장면도 영화 초반에 나온다.) 이제 그들은 정적에 불과하다.

앤 여왕의 계획은 치밀했다. 일단 자신을 지근거리에서 수발을 드는 사라를 멀리해야 했다. 그리고 때마침 애비게일이 눈에 띈 것이다. 귀족의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는 애비게일은 이용하여 사라를 자신에게 떼어 놓은 앤 여왕은 휘그당의 고돌핀(제임스 스미스) 총리를 실각시키고 토리당의 당수 할리(니콜라스 홀트)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하며 의회를 장악한다. 그 덕분에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낼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말버러에게 누명을 씌워 국외로 추방할 수 있었다.

사라가 몸이 아픈 앤 여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시절과는 달리 사라를 내쫓은 후 앤 여왕은 직접 국정을 돌보는데, 그것이 분명 앤 여왕이 원했던 노림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애비게일이 분수도 모르고 사라처럼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화의 마지막 애비게일의 머리를 짓누름으로써 그녀가 하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킨다. 영화 마지막 의기양양하던 애비게일이 당혹스러워하고, 그 위에서 애비게일을 쳐다보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 앤 여왕의 모습은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가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낸 영화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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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라는 것이 이토록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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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권력의 허무함이 아닐까? 앤 여왕의 왕위에 오르자 이 세상에 제 것 만 같았던 사라도, 사라와의 권력 다툼에서 성공함으로써 이제 영국이 내 손아귀에 있다며 의기양양하던 애비게일도, 결국은 앤 여왕의 권력에 놀아난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비게일을 이용해서 사라를 내쫓음으로써 목적을 달성한 앤 여왕은 행복했을까? 영화에서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말버러가 영국에서 쫓겨나 유럽 대륙으로 망명을 한 것이 1711년의 일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배경도 1711년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앤 여왕은 1714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여왕의 반대파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결국 앤 여왕의 승리는 고작 3년 밖에 지속되지 못한 셈이다. 앤 여왕의 사망하고 1714년 조지 1세가 즉위하자 말버러는 총사령관으로 복직하였다고 하니... (그 역시도 복직하자마자 곧 사망했다) 그녀의 승리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이던가.

솔직히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를 볼 땐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이 영화를 허수아비 여왕인 앤 여왕을 차지하기 위한 애비게일과 사라의 암투로 본다면 애비게일의 승리라는 결말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사라가 마지막에 애비게일을 향해 좀 더 뜨악할만한 발악을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장면은 없다.) 하지만 앤 여왕을 둘러싼 실제 역사를 알고 나니 영화 자체가 다르게 보였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앤 여왕의 표정은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녀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당연히 가져갈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만큼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는 아는 만큼 더 재미있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