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린 소녀] - 지금까지의 '밀레니엄' 중 가장 평범하다.
감독 : 페데 알바레즈
주연 : 클레어 포이, 실비아 획스, 스베리르 구드나손
세 편의 '밀레니엄', 세 명의 리스베트 살란데르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내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소설이다. 물론 그 시작은 위즈덤 하우스의 e-Book인 북릿과의 악연이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평상시라면 관심조차 없었을 스웨덴 소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 재미에 푹 빠질 수가 있었다. 최근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7년 만에 다시 읽었으며, 내친김에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와 <벌집을 발로 찬 소녀>까지 읽었다. 이로써 스티그 라르손이 쓴 '밀레니엄 3부작'에 대한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는 총 세 번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가장 먼저 스웨덴에서 2009년에 제작된(국내엔 2012년에 개봉되었다) '밀레니엄 3부작'이 있다. 이 영화에선 누미 라파스가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미카엘 니크비스트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를 연기했었다.
'밀레니엄 시리즈' 중 1편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2011년 미국에서 영화화되었는데,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는 제목으로 2012년에 국내 개봉한 이 영화에서 데이빗 핀처가 연출을 맡았고, 루니 마라, 다니엘 크레이그가 각각 리스베트 살란데르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를 연기했다. 하지만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아 2편 제작은 무산되었다. 지난 2018년 11월에 개봉한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세 번째로 제작된 '밀레니엄'은 셈인데, 클레어 포이와 스베리르 구드나손이 각각 리스베트 살란데르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를 연기했다.
애초에 이 영화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월드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스티그 라르손은 2004년 11월 9일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벌집을 발로 찬 소녀>의 원고만 출판사에 넘긴 상태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애초에 그가 '밀레니엄 시리즈'를 총 10부작으로 기획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일곱 편의 '밀레니엄'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스티그 라르손의 유족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를 '밀레니엄 시리즈'를 이끌어나갈 공식 작가로 지정했고, 곧바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는 2015년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쓰며 '밀레니엄'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솔직히 걱정이 앞선 것은 사실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3부작'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울만한 걸작이다. 그런데 과연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그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차라리 미완인 채로 남겨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밀레니엄 3부작'을 다 읽은 후에도 내가 선뜻 <거미줄에 걸린 소녀>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흥행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데이빗 핀처 감독의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후속편을 기대해볼 만한 영화였다. 그런데 제작사는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대신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영화화했다. 스티그 라르손의 정통 '밀레니엄 월드'가 아닌, 대체 작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밀레니엄 월드'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보기 위해 내가 극장으로 달려가지 않은 이유이다.
그녀는 너무 평범했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북미는 물론, 국내 흥행에서도 거의 참패 수준의 성적을 올렸다. 내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내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니까...
천재적인 해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소녀, 그리고 사회 부적응자이기도 한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힘없는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을 혼내주는 정의의 전사이기도 하다. 과연 클레어 포이는 그러한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어떻게 연기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평범했다. 누미 라파스의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원작과 가장 가까웠고, 루니 마라가 연기한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가장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클레어 포이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그냥 평범하기만 하다.
어쩌면 원작에서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평범하게 변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거액의 돈을 손에 거머쥐고,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에게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조금씩 변해갔었다.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가슴 확대수술하고 온몸을 휘감은 문신을 일부 지우기도 했다. 그렇기에 클레어 포이가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평범한 해커로 연기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가 평범해 보인다는 것은 [거미줄에 걸린 소녀]의 가장 큰 약점이 된다.
젊다고 무조건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의 흥행 전략은 눈에 뻔히 보인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흥행 실패로 거액의 제작비를 쓸 수 없었던 페데 알바레즈 감독은 루니 마라, 다니엘 크레이그와 같은 스타급 배우 캐스팅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 하고, 무명의 배우들로 자리를 메꾸었다. 그 대신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평범함이 그러한 흥행 전략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페데 알바레즈 감독은 너무 독특한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개성이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흥행 실패 요인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역으로 스베리르 구드나손이라는 젊은 배우를 캐스팅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50대의 중년 기자이다. 스웨덴 영화에서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를 연기한 미카엘 니크비스트가 원작의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가장 가깝다. 그런데 [거미줄에 걸린 소녀]의 마카엘 블롬크비스트는 갑자기 30대의 나이로 확 젊어졌다. (실제 스베리르 구드나손의 나이는 41살이다)
영화 자체도 천재 해커가 음모에 빠지는 전형적인 스릴러의 전개를 가지고 있다.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전 세계 핵무기를 원격 조정할 수 있는 위험한 장치를 파괴함으로써 인류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영웅이 되었다. 그 덕분에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이야기의 스케일이 커졌고, 보편적인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지녔지만 '밀레니엄 시리즈'만의 개성은 사라져 버렸다.
카밀라 살란데르의 등장이 유일한 장점
개성 강한 '밀레니엄 시리즈'를 너무 평범하게 만든 것이 [거미줄에 걸린 소녀]의 단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밋밋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쌍둥이 동생인 카밀라 살란데르(실비아 획스)의 등장은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봐야 할 유일한 이유가 되어 준다.
지금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탄생하게 만든 아버지 알렉산드로 살라첸코는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벌집을 발로 찬 소녀>에서 죽임을 당했다.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이제 남은 가족은 쌍둥이 동생인 카밀라 살란데르 뿐. 만약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스티그 라르손의 뒤를 잇지 않았다면 그녀의 등장은 영영 없었을 것이다. 암튼 리스베트와는 달리 아버지에게 도망가지 않고 아버지 곁에 남은 카밀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직을 물려받고 자신을 외면한 언니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결국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의 뒤를 이어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족쇄이기도 한 혈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카밀라의 죽음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만큼 그녀와의 대결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면 '밀레니엄 시리즈'가 계속 영화화되어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거미줄에 걸린 소녀]만 놓고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팬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다시 누군가 '밀레니엄 시리즈'를 제대로 리부트 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