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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엄유나

주연 : 유해진, 윤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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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보편적인 재미와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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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 나는 아들과 주말 동안 볼 영화를 고른다. 기대작이 한 편 이하일 경우는 큰 문제가 없는데, 두 편 이상일 경우에는 함께 예고편을 보며 한 편을 선택한다. 지난주에는 [말모이], [내안의 그놈], [그린 북]으로 기대작이 세 편이어서 그중 한 편을 고르는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내심 1960년대 미국의 인종 차별을 풍자한 [그린 북]이 보고 싶었고, 아들은 1940년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우리 말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말모이]를 보고 싶어 했다. 결국 남의 나라의 과거 이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과거 이야기가 나을 것 같아 [말모이]가 선택됐다.

솔직히 일제 탄압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제 특별할 것이 없다. 게다가 [말모이]의 경우는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뻔히 눈에 보인다. 유해진의 코믹 연기로 관객을 웃긴 후 우리 말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희생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 것이다. 예고편만 봐도 영화의 밑그림이 저절로 그려질 정도이다. 이렇게 뻔한데도 이상하게 [말모이]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리고 내 아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모이]는 예고편을 보며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영화이다. 다시 말해 뻔한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말모이]를 보며 웃고, 울었다. 너무 뻔해서 지루할 법도 한데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부담 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라며 칭찬한 [내안의 그놈]을 보며 지루함을 느꼈던 내가 왜 이토록 뻔한 [말모이]에게는 웃음과 감동을 느꼈을까? 그것을 단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왜 [말모이]를 보며 웃고, 울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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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유해진 표 코믹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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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의 주연은 유해진이다. 그 순간 [말모이]가 무엇으로 관객을 웃기려 하는지 딱 그림이 그려진다. 그리고 유해진은 그러한 그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실하게 수행한다. 유해진이 연기한 김판수는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이다. 극장에서 일하지만 장춘삼(이성욱)이 극장 관객을 상대로 소매치기하는 것을 눈감아주고, 극장에서 해고된 후에는 류정환(윤계상)의 가방을 훔치려 한다. 잡범으로 감옥도 수시로 들락날락 했다. 처음 조선어학회 면접을 보러 온 판수를 정환이 인간 말종 취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수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일제 시대, 돈 없는 서민이 굶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판수의 뺀질거림은 오히려 삶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환의 가방을 훔친 것은 아들의 학비 때문이라는 명분도 있다. 그렇기에 조선어학회의 조갑윤(김홍파)은 판수를 두둔하고 나선다.

물론 판수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만든 것은 시대적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유해진의 코믹 연기도 한몫하는데 [말모이]에서 유해진의 코믹 연기는 정확히 2014년 개봉작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의 철봉과 닮아 있다. [말모이]에서 판수가 후려치다와 휘갈기다의 차이를 설명하는 장면은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에서 철봉(유해진)이 장사정(김남길) 일당에게 고래를 설명하는 장면과 교묘하게 오버랩된다. 이제는 하나의 흥행 보증 수표가 된 유해진의 코믹 연기는 이렇게 [말모이]에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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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갈등의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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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의 감독은 엄유나라는 신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는 [택시운전사]의 각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2017년 개봉작인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에 간 서울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의 이야기를 감동 깊게 그려낸 영화로 무려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이다. [택시운전사]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의 감동적인 소재, 송강호의 연기, 장훈 감독의 연출력 등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엄유나의 뛰어난 각본도 분명 한몫을 해냈다. 그래서일까? 엄유나 감독이 직접 쓴 [말모이]의 각본은 꽤 탄탄한 편이다.

일단 내가 눈여겨본 것은 판수와 정환의 관계이다. 이 두 캐릭터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이다. 잡초 같은 밑바닥 인생인 판수와는 달리 정환은 유학을 다녀온 명문가의 자제이다. 정환이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데 모든 것을 바친 지식인이라면, 판수는 그저 먹고살기 바쁜 까막눈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처음부터 악연으로 시작했다. 영화에서 판수와 정환이 서로 티격태격하며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물과 기름 같은 이 두 캐릭터를 어떻게 화해시키고 융합할 것인가? 이것은 [말모이]의 가장 큰 숙제이다. 그런데 엄유나 감독은 이 숙제를 무리 없이 해낸다.

정환과 판수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굉장히 매끄럽다. 판수를 오해한 정환의 진심 어린 사과, 한글을 배우면서 우리 말의 소중함을 알게 된 판수의 깨달음, 이 과정에서 억지스러움은 없다. 조선어학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던 판수가 자연스럽게 우리말 사전 편찬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지사가 되는 과정을 보며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한 내 가슴이 뜨거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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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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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는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실제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1942년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 경찰은 박영옥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우리말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을 파악하고 이를 꼬투리 삼아 조선어학회 소속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하게 된다. 1942년 10월,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 것을 시작으로 우리말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이 모두 치안유지법 내란죄로 몰렸다.

엄유나 감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가상의 캐릭터들을 채워 넣었다. 친일파로 변절한 아버지를 원망하며 조선어학회를 이끌어 나가는 류정환은 물론 가상의 캐릭터이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를 이끄는 조갑윤, 임동익(우현), 박훈(김태훈), 구자영(김선영), 민우철(민진웅) 역시 가상의 캐릭터이며 그렇기에 그들이 만들어낸 에피소드 또한 영화적 창작이다. [말모이]는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차용했지만, 영화 속 모든 이야기는 엄유나 감독의 창작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다. 실제로 우리말 사전의 밑바탕이 된 '말모이'의 원고가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말모이' 원고가 왜 서울역 창고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유나 감독은 이 사실을 토대로 김판수라는 캐릭터를 만들었고, 그를 통해 '말모이' 원고가 어떻게 서울역 창고에 숨겨지게 되었는지 영화적 상상력을 펼친다. 그런데 그러한 가설이 꽤 그럴듯 하다. 이렇듯 [말모이]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나에게는 정말 저랬을지도 모른다는 감동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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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드는 것은 나와 같은 소시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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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의 이야기가 내게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분명 역사에 기록된 것은 조선어학회를 이끌어나간 지식인이다. 하지만 판수처럼 기록되지 않은 소시민의 희생 역시 있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에서 심부름꾼 일을 하는 등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데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말모이]는 결국 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만약 일제 시대를 살았다면, 아마 나 역시도 판수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정환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조선이든, 일제이든 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위인처럼 큰 발자국은 아닐 것이다. 아주 작은, 그래서 수십, 수백 명이 모여야 겨우 보일락 말락한 작은 발자국이라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겠지만 그런들 또 어떠랴. 그렇기에 영화에서 판수가 감옥 동기들을 데려오며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네 놈의 한 발자국이 더 낫지 않겠어?"라는 대사는 깊은 울림을 안겨줬다.

분명 [말모이]는 뻔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뻔함 속에서도 유해진의 코믹 연기는 웃음을 준다. 물론 유해진의 코믹 연기 또한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었으니 어찌 되었건 [말모이]의 웃음 코드는 내게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 후반 나는 찡한 감동을 받았다. 물론 그러한 감동 또한 영화를 보기 전에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시울은 뜨거워졌으니 [말모이]가 제아무리 뻔하다고 해도 영화의 이야기는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웃음과 감동이 뻔한 [말모이]를 내게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 영화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