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털 엔진] - 감정선은 서투르지만, 화려한 볼거리로 아쉬움을 상쇄하다.
감독 : 크리스찬 리버스
주연 : 헤라 힐마, 로버트 시한, 휴고 위빙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매년 100편에서 200편의 영화를 보고 그중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최고의 영화를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그동안 내가 본 영화들을 나열해 놓고 내 인생 최고의 영화를 찾기에 나섰다. 그리고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내가 고른 것은 [반지의 제왕 3부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마르고 닳도록 본 것은 아니다. 극장에서 한번, 생일선물로 받은 [반지의 제왕 3부작] DVD 세트를 통해 한, 두 번 봤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내 인생의 영화로 선택한 이유는 1편이 끝나고 2편을, 2편이 끝나고 3편을 기다리는 1년의 시간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행복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2003년 12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보고 나서는 이 매력적인 시리즈가 끝났다는 생각에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호빗 3부작]의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땐 눈물이 흐를 만큼 기뻤었다.
내가 [모털 엔진]을 기대한 이유도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연출한 피터 잭슨 감독의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모털 엔진]은 피터 잭슨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아니지만 그가 각본과 제작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모털 엔진]은 2018년 12월의 최고 기대작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미리 [모털 엔진] 전용 예매권 3장을 구매했고,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토요일 오후, 온 가족을 이끌고 극장으로 향했다.
[모털 엔진]은 아직 북미에서 개봉하지 않았지만 흥행 전망은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한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북미보다 일주일 먼저 개봉한 우리나라에서 [모털 엔진]의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성적은 5위에 불과하다. 특히 CGV 단독 개봉작인 [호두까지 인형과 4개의 왕국]보다 성적이 안 좋은 것이 치명타이다. 안타깝게도 이대로 국내 흥행은 실패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나는 [모털 엔진]이 재미있었다. 물론 [반지의 제왕 3부작]처럼 최고의 영화라는 칭호를 내려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동안 즐거웠다.
물론 [모털 엔진]을 재미없게 본 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만큼 [모털 엔진]의 단점은 명확하다. [모털 엔진]의 캐릭터들은 굉장히 복잡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지만 러닝타임이 한정된 영화에서는 그러한 감정선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테데우스 발렌타인(휴고 위빙)은 도시진화론을 맹신하게 되었으며 반 견인 도시주의 연맹인 샨 구오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발렌타인의 광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모호하다.
헤스터 쇼(헤라 힐마)와 톰 내츠워디(로버트 시한)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세밀하지 못하다. 발렌타인에 대한 복수심 하나로 똘똘 뭉친 헤스터와 런던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톰은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화 초반 톰의 어처구니없는 행동 때문에 헤스터가 부상을 당하는 장면에서는 이 발암 청년에 대해 짜증까지 밀려 올라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헤스터는 톰을 사랑하게 된다. 이 뜬금없는 사랑은 슈라이크(스티븐 랭)라는 막강한 빌런조차 무장해제하게 만드는데, 그렇기에 더욱더 헤스터와 톰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좀 더 자세히 그려져야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모털 엔진]의 단점은 방대한 원작을 지닌 대부분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처음부터 3부작으로 기획되며 이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 하지만 [모털 엔진]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2시간 8분 동안 원작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내야 했고, 그것이 캐릭터의 감정선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단점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최소한 2부작으로 기획되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모털 엔진]을 재미있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캐릭터의 감정선을 알아서 이해하고 너그럽게 넘어가 줘야 한다. 먼저 영화적 배경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모털 엔진]의 세계관은 2118년에 일어난 60분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60분 전쟁의 원인은 양자 에너지를 무기화한 메두사라는 가공할만한 무기에 의한 것인데, 단 60분 만에 지구를 초토화할 만큼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60분 전쟁으로 살아남은 이들은 황폐화된 지구에서 필요한 자원을 찾아 떠돌아다녀야 했고, 이것이 견인 도시로 발전한다. 큰 부족이 작은 부족을 정복하듯이 큰 견인 도시는 작은 견인 도시를 정복하며 발전한다. 이것이 도시진화론이다. 이는 제국주의와도 비슷한 개념이기도 하다.
영국이 제국주의를 선언하며 식민지 건설에 주력했듯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영국에 대한 당시의 칭송은 영국이 얼마나 악랄하게 제국주의에 앞장섰는지 알려준다.) 견인 도시 런던 역시 작은 도시들을 집어삼키며 발전해나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런던은 더욱 거대해지고 더 이상 작은 견인 도시를 집어삼키는 것으로는 유지가 힘들어진다. 결국 발렌타인은 땅에 정착하여 스스로 자원을 개발하며 살아가는 반 견인 도시주의 연맹에 눈길을 돌리고, 그들의 방어막을 부수기 위해서는 60분 전쟁의 원인인 메두사를 부활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결국 발렌타인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인 셈이다. 60분 전쟁으로 지구가 황폐화된 것은 1,600년 전의 일이다. 이제 지구는 스스로 회복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땅에 정착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결국 샨 구오와의 전쟁을 선택한다. 이러한 발렌타인의 어리석음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헤스터는 발렌타인에게 어머니를 잃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던 헤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뿐이다. 그리고 반인반로봇 슈라이크에 의해 키워진다. 비록 헤스터가 발렌타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쩌면 톰은 헤스터가 처음 만난 또래 남자였을 것이다. 처음엔 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어 그를 차갑게 대하지만, 결국엔 자신도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녀가 갑자기 톰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슈라이크라는 존재이다. 슈라이크는 인간으로서는 이미 죽었지만 기계로 부활한 병기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기 전의 인간성을 조금씩 되찾게 된다. 그가 헤스터를 구하고 돌봐준 이유도 인간이었던 시절 아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세상 모든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슈라이크 역시 헤스터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렇기에 헤스터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그녀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헤스터를 기계화시키려 한다. 결국 슈라이크가 헤스터를 쫓는 것은 복수심 때문이 아닌, 잘 못된 길로 가는 딸을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것이다. 헤스터가 톰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슈라이크는 더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닌, 성인이 된 딸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헤스터를 놓아 준다. 그리고 헤스터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생명력도 소진된다. 슈라이크의 죽음은 조금 뜬금없지만, 나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슈라이크가 헤스터를 놓아주는 장면에서 찡한 감동이 느껴졌다.
인정한다. 발렌타인, 헤스터, 톰, 슈라이크의 감정선은 너무 서투르게 표현되었다. 조금만 잘 다듬었다면 화려한 볼거리와 찡한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캐릭터의 감정선을 알아서 이해하고, 너그럽게 넘어간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에 의한 쾌감이다.
견인 도시 런던의 위용은 대단했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런던이 다른 작은 도시들을 공격하는 장면은 영화를 기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압도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모털 엔진]에는 런던 외에도 인상 깊은 세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영화 중반 헤스터와 톰을 노예 시장에 팔아버리는 일당의 도시인 스커틀버트는 마치 지네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무역 공간인 구름 속 도시인 에어헤이븐도 환상적이었다. 반 견인 도시주의자이며 테러리스트인 안나의 비행선 제니 하니버는 우아하기까지 했다. 마치 만화책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듯한 이 세트들은 [모털 엔진]을 보기 위해 2시간이 넘는 시간과 2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 것이 전혀 아깝게 느끼지 않게끔 만들었다.
[모털 엔진]을 보고 나온 우리 가족의 의견은 같았다. 엄청나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볼 만 했다는 평이다. 특히 아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슈라이크라는데 나와 의견 일치를 보았다. 스스로 이과임을 선언한 아들은 조금 독특한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발렌타인이 메두사로 샨 구오의 장벽을 공격할 때 단번에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는 그가 문과이기 때문이란다. 만약 발렌타인이 이과라면 수학공식을 이용해서 샨 구오 장벽의 아랫부분을 공격하여 단번에 무너뜨렸을 것이라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아들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추운 날씨 속의 영화 관람이었지만 이쯤 되면 나의 가족에겐 꽤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