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미키 타카히로
주연 : 치넨 유리, 고마츠 나나, 나카가와 타이시

가끔 나는 볼만한 TV 프로가 없을 때마다 케이블 TV VOD 무료 영화 채널로 리모컨을 누른다. 사실 큰 기대는 없다. 무료 영화이다 보니 이미 본 영화 혹은 굳이 볼 필요가 없어 보이는 영화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보고 싶었던 영화가 떡 하니 무료 영화 채널에 등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지난 11월에는 [마일 22]가 그러했고, 이번에는 [언덕길의 아폴론]이 그러했다.
[언덕길의 아폴론]은 일본의 청춘 멜로 영화이다. 지난 10월 목동 메가박스의 '계단 아래 만화방'에서 영화의 원작인 코다마 유키의 장편 만화 <언덕길의 아폴론> 중에서 1권의 초반부를 잠시 읽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영화였는데, 이미 극장 상영이 종료된 터라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VOD 무료 영화로 보게 되었으니 내겐 인연이 닿는 영화인가 보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1960년대,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온 카오루(치넨 유리)는 전학 첫날 학교 최고의 불량아 센타로(나카가와 타이시)와 그의 소꿉친구 리츠코(고마츠 나나)를 만나 우정을 쌓는다. 그들을 연결해준 것은 재즈. 하지만 그들의 우정은 곧 위기를 맞이하고, 그렇게 그들은 10년간 서로 떨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카오루는 의사가 되고, 리츠코는 선생의 길을 걷던 와중에 연락에 끊겼던 센타로가 한 성당에서 신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카오루와 리츠코는 다시 재회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어찌 보면 [언덕길의 아폴론]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영화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일본 멜로 영화의 특징을 보자면 판타지적 설정을 넣는 경우가 많은데 [언덕길의 아폴론]은 그런 것 없이 정공법으로 밀고 나간다. 카오루, 센타로, 리츠코의 갈등도 별것 아니다. 그냥 엇갈린 첫사랑일 뿐이다.
카오루는 리츠코를 사랑하고, 리츠코는 센타로를 사랑하고, 센타로는 미대생 누나인 유리카를 사랑하고, 유리카는 운동권 대학생 준이치를 사랑한다. 처음엔 카오루와 리츠코, 센타로 간의 삼각관계인 줄 알았던 영화는 유리카의 등장과 더불어 복잡한 양상을 띈다. 하지만 유리카가 준이치를 선택하자 카오루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는 센타로의 모습은 조금 억지스럽다.
젊은 배우들의 연기는 솔직히 어이없었다. 마치 70, 80년대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청춘 멜로 '얄개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연기 자체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특히 센타로를 연기한 나카가와 타이시의 연기가 가장 과장되었는데,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 튀어나온 것 같다. 아마 만화를 원작으로 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연기를 펼쳤는지도 모르겠지만, 엄연히 만화와 영화는 다르다. 그렇기에 연기 톤도 달라야 한다.   

 

 

[언덕길의 아폴론]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여주인공인 리츠코의 수동적 캐릭터이다. 일본의 청춘 멜로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항상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카오루와 센타로에게 행동의 동기를 선사하지만 정작 본인은 주변에서 응원하는 것 외엔 별로 하는 일이 없는 캐릭터. 대표적으로 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농구 만화 <슬램덩크>가 그런 식이다. 주인공인 강백호는 채소연의 권유로 상북고 농구부에 가입을 하여 좌충우돌 소동을 벌이며 성장한다. 하지만 정작 채소연은 강백호를 응원하는 것 외엔 별로 하는 일이 없다.
리츠코가 정확히 그러하다. 클래식 피아노를 좋아하는 카오루가 재즈의 세계에 빠지게 된 것은 리츠코 때문이다. 리츠코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재즈의 광팬이지만, 그녀가 하는 딱히 일은 없다. 센타로를 드럼을 치고, 카오루는 피아노를 치지만 정작 이들을 재즈의 세계로 인도한 리츠코는 주변에서 응원하는 하는 역할이 전부이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에 리츠코가 카오루와 센타로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나는 드디어 리츠코가 웃고, 우는 것 외에 새로운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를 모았지만 센타로와 리츠코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며 내 기대는 무산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카오루와 센타로의 연주에 맞춰 리츠코가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영화는 끝난다. 결국 리츠코는 <슬램덩크>식 수동적 여주인공의 틀에 갇혀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언덕길의 아폴론]은 그리 잘 만든 청춘 멜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 전반에 흘러나오는 재즈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모던 재즈의 대표곡 'Art Blakey and the Jazz Messengers'의 'Moanin'은 재즈의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참 감미로웠다. 특히 카오루의 피아노와 센타로의 드럼의 합주는 영화의 명장면이다.
[언덕길의 아폴론]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OST로 유명한 ‘My Favorite Things’ 연주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Moanin'과는 달리 귀에 익숙한 ‘My Favorite Things’의 음악이 흘러나올 땐 반갑기도 했다. 단지 ‘My Favorite Things’에 맞춰 리츠코가 노래를 불렀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리츠코의 노래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언덕길의 아폴론]은 2009년 여성 작가 코다마 유키의 장편 만화로 시작하여, 2012년에는 일본 후지 TV에서 12부작 애니메이션으로 방영이 되었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감미로운 재즈 선율을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지만 원작 만화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영화를 보고 나니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다시 '계단 아래 만화방'을 찾아 원작 만화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