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최국희
주연 : 김혜수, 유아인, 허준호, 조우진, 뱅상 카셀

2012년 11월, 나는 중앙일보의 연락을 받고 IMF 당시 내가 겪었던 것들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당시 중앙일보는 IMF 15주년 특집 기사를 준비 중이었고, IMF 당시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IMF 시대를 대변하는 청년으로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솔직히 색다른 경험을 한다는 기분으로 인터뷰에 응했는데, 며칠 안되어서 중앙일보에 내 사진과 당시의 내 이야기가 큼지막하게 실려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덤덤하게 당시의 일을 이야기했는데, 신문에는 마치 내가 IMF로 인하여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처럼 쓰여 있었다. 특히 내 이야기의 마지막에 "혹독한 취업난과 만혼 풍조가 이 세대부터 시작돼 피해 의식이 클 수도 있다"라는 전문가의 말이 덧붙여져 있어서 주위 사람으로부터 한참 동안 놀림을 당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지난 2017년 이번엔 SBS에서 연락이 왔다. IMF 2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인데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거절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와의 또 다른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은 크기에 나는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엔 놀림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두 번의 인터뷰 요청을 겪고 나니 내겐 IMF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IMF는 정말 악몽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이 되지 않아 2년간 공공 근로를 하며 생활을 해야 했고, 내 집 마련이 평생의 꿈이었던 부모님은 하필 IMF 직전에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바람에 폭등한 이자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셨다. 당시 아버지, 어머니가 남몰래 흘린 눈물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젠 모두 지난 일이라며 웃고 넘어가기엔 IMF가 남긴 상처는 이렇게 너무 크다.   

 

 

 

 

IMF를 소재로 한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조건 개봉 첫날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직도 나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IMF가 대한민국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덮친 것이며, 이 모든 고통을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모두 감수해야만 했던 것인지... 어쩌면 [국가부도의 날]이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부도의 날]은 네 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곧 엄청난 경제 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대한민국의 위기를 이용해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재벌 위주로 재편하려고 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대한민국의 위기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대한민국의 위기를 알 리가 없는 작은 공장의 사장이자 평범한 가장 한갑수(허준호)가 [국가부도의 날]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IMF라는 비극의 시대를 대변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중앙일보에서 내게 IMF 시대의 청년을 대변시킨 것처럼 말이다. 그중에서 한시현은 가장 이상적인 주인공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가장 먼저 포착했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한국은행 총장(권해효)에게 끊임없이 보고서를 올린다. 그녀는 어떻게든 일반 선량한 서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지만 그녀의 방법은 무능한 관료들과 재정국 차관에 의해 번번이 무시된다.   

 

 

한시현이 가장 이상적인 주인공이라면 그 대척점에 서있는 재정국 차관은 IMF 시대를 대변하는 악당이다. 그는 정부의 고위 관료이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무능하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국가부도의 날]의 재정국 차관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는 가상의 인물이다. 정말로 당시 김영삼 정부의 고위 관료 중에서 대한민국의 경제를 재벌 위주로 재편하기 위해 위기를 이용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대한민국의 위기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을 막는다는 미명 아래 사실을 숨겼고,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일반인의 피해를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위기가 막상 눈앞에 닥치자 IMF와의 졸속 협상을 벌인 것 역시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이 다른 꿍꿍이가 없었다면 그들은 그저 무능했던 것뿐이리라. 어느 것이 더 최악인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부도의 날]에서 정부의 고위 관료를 IMF 시대를 대변하는 악당으로 설정한 것은 적절했다.
실제로 IMF 시대가 되자 한국 경제는 재벌 위주로 재편되었고, 근로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열악한 환경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의 상황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정부는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비정규직이라는 희생을 부탁했고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비정규직을 없애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현재까지 지켜지지 않았다. 하긴 재벌 입장에서 회사에 인건비를 획기적으로 절약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없애고 싶을 리가 없다. 결국 영화 속 재정국 차관의 속내처럼 대한민국의 IMF는 일부 재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경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누군가는 IMF로 인하여 실업을 하고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았지만, 누군가는 IMF로 인하여 돈을 벌고 부자가 된다. [국가부도의 날]에서는 윤정학이 그러한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윤정학을 욕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윤정학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정학의 행동은 당연한 성공신화이다. 지금의 재벌들 대부분은 한국전쟁의 위기를 발판으로 성장했다. 그래도 [국가부도의 날]은 윤정학에게 마지막 양심만큼은 남겨 두었다. 대한민국의 위기를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고 좋아하는 젊은 투자자(류덕환)를 주먹으로 치며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는 장면을 통해서 말이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캐릭터는 당연 한갑수이다. 영화의 오프닝씬 뉴스 장면에서 대한민국 경제의 호황을 보도하며 국민의 80%가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갑수 역시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소시민이다. 공장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해주고, 열심히 일을 하면 언젠가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IMF는 이마저도 빼앗아 버렸다. 
만약 정부에서 대한민국의 위기를 좀 더 빨리 발표했다면 한갑수가 그런 무리한 계약을 맺었을 리가 없다. 나의 부모님 역시 대한민국의 위기를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은행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사지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한시현은 말한다. 왜 모든 고통을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전가시키려 하느냐고... 사실이 그렇다. 한갑수는 어쩌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한갑수는 IMF를 겪고 나서 아들에게 '나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고, 외국인 노동자에게 호통을 치는 나쁜 사장이 되어버린다. IMF는 선량했던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