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주연 : 폴 다노, 조 카잔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작가 존 그레이가 그러한 남녀의 차이를 화성과 금성이라는 명징한 비유로 풀어낸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완벽한 타인]에서 예진(김지수)은 남녀의 차이를 안드로이드폰과 아이폰으로 비교하는데, 그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의 공감의 웃음을 짓기도 했다. 굳이 책이나 영화를 빗대지 않아도 남녀의 차이는 우리가 생활하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결혼한 사람이라면 더욱더...
[루비 스팍스]의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천재라는 칭송을 얻어낸 베스트셀러 작가 캘빈 웨어필드(폴 다노)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관계에서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다. 그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붙임성 좋은 형 해리(크리스 메시나) 뿐이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도 하고, 개를 키우기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다. 특히 그는 옛 연인 릴라와 헤어진 후 여자에 대한 내면적 공포를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 서툰 그에게 자신과 전혀 다른 뇌 구조를 가진 여자와의 관계가 더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 앞에 루비(조 카잔)가 나타난다. 캘빈이 쓴 원고 속, 완벽한 이상형이 책을 뚫고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캘빈이 상상하고 쓰는 대로 변신하는 루비. 이제 캘빈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완벽한 루비와 사랑을 시작한다. 그런데 과연 그 사랑은 순탄할까?  

 

 

 

 

루비의 존재를 확인한 해리는 캘빈에게 "완벽하다"라며 부러워한다. 그도 그럴 것이 캘빈이 타자기에 앉아 글을 쓰면 그대로 루비는 변하기 때문에 루비의 모든 것은 캘빈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캘빈은 이해하지 못할 여자의 변덕 때문에 속앓이를 할 필요가 없다. 남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한동안 캘빈과 루비의 사랑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루비가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로 하자 캘빈은 루비가 자신에게만 매달리는 캐릭터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잠시도 캘빈과 떨어지려 하지 않던 루비는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할 수없이 캘빈은 루비의 캐릭터를 유쾌하게 만든다. 캘빈이 쓰는 대로 루비는 바뀐다. 하지만 루비가 그렇게 캘빈 마음대로 바뀌면 바뀔수록 루비만의 매력은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캘빈과 루비의 관계는 파탄을 맞이한다.
물론 캘빈과 루비의 사랑은 판타지다. 남자가 쓰는 대로 바뀌는 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대방을 내 기준에 맞춰 바꾸려 한다.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는 다른 부분이 눈에 거슬리게 되고, 나와 맞게 상대방을 바꾸려 다투게 된다. 성격차이로 이혼하는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러한 과정을 겪은 후 결국 결별을 맞이하는 것이다. 마치 캘빈과 루비의 사랑이 결국엔 깨졌듯이...   

 

 

[루비 스팍스]는 판타지를 가미한 로맨틱 코미디이다. 그리고 그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루비를 연기한 조 카잔은 확실히 매력적이었고, 캘빈을 연기한 폴 다노는 적당히 찌질했다. 루비와 캘빈의 사랑은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적인 구조를 충실히 따라간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러한 과정 속에 관객으로 하여금 "아, 나도 사랑하고 싶다."라고 느끼게 한다면 성공인 셈인데, [루비 스팍스]가 정확히 그러하다.
그러면서 판타지적 설정을 살짝 가미해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을 탈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도를 넘지 않았다. 루비가 캘빈의 글 속에서 나온 여자가 아니라고 해도 영화의 전개에 큰 무리가 없다. 상대방을 바꾸려는 시도는 권력을 가진 자만이 시도할 수 있다. [루비 스팍스]에서 캘빈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루비는 화가 지망생일 뿐이다. 게다가 루비는 캘빈의 집에 얹혀산다. 당연히 두 사람의 권력관계에서 캘빈은 우위를 점하고 있고, 그렇기에 캘빈은 루비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려고 한다. 굳이 판타지적 설정이 없어도 이러한 캘빈과 루비의 관계는 충분히 현실 속에 가능한 이야기인 셈이다.
내가 [루비 스팍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균형감이다. 너무 판타지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현실적이지도 않다. 현실을 판타지적으로 살짝 변형해서 상대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려는 어리석은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루비 스팍스]의 결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결국 캘빈은 루비를 놓아 준다.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글 속의 주인공이 아닌, 그래서 자신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완벽한 이상형이 아닌, 스스로의 자의식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영 루비를 그녀를 잃더라도, 불행해하는 그녀를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를 잃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바꿈으로써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바뀌야 한다. 스스로를 바꿀 정도의 의지가 있어야 금성 남자와 화성 여자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캘빈은 루비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스스로 루비를 자유롭게 놓아줌으로써 자신을 바꾸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정 루비를 사랑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보다 더 완벽한 해피엔딩이 있을까?
솔직히 별 기대 없이 [루비 스팍스]를 봤다. 몇 달 전에 읽은 기욤 뮈소의 장편소설 <종이 여자>와 설정이 비슷해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폴 다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조 카잔이 누군지도 몰랐다. 게다가 2012년 영화가 지난 5월에 뒤늦게 국내 개봉한 것도 왠지 수상했다. 그런데 막상 [루비 스팍스]를 보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배우 명단에 조 카잔을 새롭게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캘빈의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로 출연한 아네트 배닝과 안토니오 반데라스도 반가웠다. 이렇게 별 기대 없이 본 영화가 재미있으면 보너스를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루비 스팍스]가 내겐 보너스 같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