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성훈
주연 : 현빈, 장동건

1982년에 발매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있다. 서영은, 동방신기, 아이유 등이 리메이크를 했던 <잊혀진 계절>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는 노랫말 덕분에 10월 31일만 되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잊혀진 계절> 덕분에 1년 365일 중 하루에 불과한 10월 31일은 왠지 특별한 날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날이 수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내에게 영화 데이트를 신청한 이유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중년에게 10월 31일은 <잊혀진 계절>로 기억되지만, 젊은 세대에게 10월 31일은 할리윈 데이로 기억이 되나 보다. 아내와 함께 간 극장에서 직원들이 할로윈 복장을 하고 관객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며 새삼스럽게 세대 차이를 느낀다. 
10월의 마지막 밤이며, 할로윈 데이이기도 그날 아내와 본 영화는 조선 시대 좀비를 소재로 한 [창궐]이다. 할로윈 데이와도 잘 어울리는 영화이다. 그래서일까? 평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극장에는 맨 앞좌석까지 관객이 꽉 들어찼다. 그런데 알고 보니 10월의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영화 관람료가 무려 5천 원이란다. 아마도 그 덕분에 평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극장 안이 꽉 찼는지도... 그러고 보니 굳이 이용의 노래가 아니더라도 2018년 10월의 마지막 날은 특별한 날이 맞는 것 같다. 

 

 

 

 

솔직히 10월의 마지막 날, 하필 [창궐]을 선택한 이유는 혼자 보기 무서웠기 때문이다. 젊었을 땐 혼자 공포 영화도 많이 보러 다녔었는데, 나이가 드니 심장이 약해졌는지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이 꺼려진다. 하지만 [창궐]은 보고 싶으니 영화 데이트를 핑계로 아내를 끌고 갈 수밖에... (아들을 끌고 갈 수도 있지만,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라 안된다.)
확실히 [창궐]은 혼자 봤다면 내 심장이 버텨낼 수 있었을지 걱정이 될 뻔한 영화이다. 일단 [창궐]은 조선판 좀비인 야귀의 분장을 꽤 실감 나게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국내 영화제 분장상 정도는 충분히 받아야 마땅할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야귀떼의 공격은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관객이 좀비 영화에서 가장 환호하는 부분이 어마어마한 좀비떼임을 [창궐]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좀비 영화는 어마어마한 좀비떼가 한꺼번에 달려들 때 느끼게 되는 공포감을 무기로 하는 장르이다. 최근 좀비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마크 포스터 감독의 2013년 개봉작 [월드워Z]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수의 좀비떼를 등장시켜 흥행에 성공했다. [월드워Z]만큼은 아니지만 연상호 감독의 2016년 개봉작 [부산행]도 같은 전략을 선택했다. [부산행]은 열차라는 좁은 공간을 좀비떼로 가득 채워 놓음으로써 사방이 좀비떼라는 공포감을 관객에게 심어줬다. [창궐] 역시 그러한 기존 좀비 영화의 무기를 잘 활용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 나간다. 시대적 배경, 캐릭터 설명 따위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듯이 제물포에 나타난 이양선을 통해 유입된 야귀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후에는 거칠 것이 없다. 자결한 형, 세자(김태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청나라에서 조선에 온 이청(현빈)의 앞에도 야귀떼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가장 안전해야 할 조선의 왕궁이라고 다르지 않다. 청나라에 굴복한 심약한 왕, 이조(김의성)를 죽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병조판서 김자준(장동건)의 음모가 그려지지만 그것도 잠시, 조선의 왕궁은 야귀떼로 점령 당한다. [창궐]은 마치 야귀떼만 보여주면 만사형통, 관객이 환호할 것이라 여긴 듯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징그러운 분장을 한 야귀떼가 영화 전체를 장악한다.
문제는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처음 야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섬뜩했고, 제물포 야귀떼의 습격 장면에서는 좀비 영화의 묘미를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야귀떼가 출몰하니 영화 후반부쯤에는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지겨워졌다. 특히 영화의 하이라이트에서 이청 혼자 수많은 야귀떼를 무찌르는 장면에서는 억지까지 느껴졌다. [부산행]에서 혼자 좀비떼와 맞선 상화(마동석)는 열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을 활용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에게 물렸다. 그런데 이청은 왕궁의 넓은 공간에서 칼 한 자루로 야귀떼와 맞서며 끝까지 물리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 장면에서 '멋있다'라는 탄성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말도 안 돼'라는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이는 [창궐]의 가장 큰 실수이다.

 

 

[창궐]의 장점을 꼽으라면 딱 한가지 밖에 없다. 야귀떼. 물론 조선 야귀떼를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야귀떼를 원 없이 보여준 것은 이 영화의 큰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야귀떼만 보여준다고 해서 재미있는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야귀떼를 둘러싼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이야기를 전개할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창궐]은 야귀떼 보여주기에 몰입한 나머지 이 중요한 사실을 잊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생략한 캐릭터를 다시 구성해보자. 추석 시즌 개봉해서 흥행에 참패한 [물괴]는 중종 6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와는 달리 [창궐]은 이조라는 가상의 조선 왕을 내세웠다. 이는 탁월한 선택이다. 어정쩡한 리얼리즘보다는 아예 판타지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야귀떼를 내세워야 할 [창궐]에겐 유리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조가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가상의 조선 왕은 아니다.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 굴욕'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조는 조선의 16대 왕 인조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자준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후 횡포를 일삼았던 김자점일 것이며, 이조 앞에서 자결한 세자는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한 비운의 세자 소현세자를, 강림대군 이청은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일 것이다. 이렇게 캐릭터를 짜 맞추고 나면 이후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조가 왜 신하인 김자준에게 꼼짝 못 하는지, 이청은 왜 청나라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는지, 세자가 이양선에서 총포를 거래한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창궐]의 캐릭터와 역사적 인물을 짜 맞추고 나면 이해가 되지만, 영화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 설명을 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창궐]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본론부터 들어가 버리니 관객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 내가 아쉬웠던 것은 김자준의 캐릭터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김자준은 오랑캐에 불과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한 이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황동혁 감독의 2017년 개봉작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김윤석)처럼 척화론 신봉자일 것이다. 만약 [창궐]이 청나라에 굴복한 이조의 나약한 모습을 좀 더 잡아내고, 이에 분노하는 김자준의 강인한 모습을 포착했다면 [창궐]은 좀 더 풍성한 이야기를 가진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자준은 단지 권력욕 때문에 야귀를 이용해 이씨 조선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 아닌, 청나라의 속국임을 자인하는 이조에 분노한 척화론자임을 [창궐]은 좀 더 내세워야 했다.
하지만 [창궐]은 날라리 왕자였다가 조선의 진정한 군왕이 되는 이청의 성장기에만 신경을 쓴다. 야귀떼와 맞서 싸우는 이청의 멋짐만을 내세우려 한다. 그렇기에 야귀에게 물렸으나 물린 부위를 스스로 잘라냄으로써 야귀도 사람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린 김자준의 후반 모습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지긋지긋한 괴물에 불과하다. 빌런이 강해야 슈퍼 히어로가 더 빛나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김자준의 캐릭터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니 이청이 멋져 보일 리가 없다.  

 

 

분명 [창궐]은 아쉬운 점이 많았던 영화이다. 이조라는 조선시대 가상의 왕을 내세웠지만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척화론자들의 갈등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이청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가 아닌가. 광해군이 펼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중립 외교가 인조반정의 원인임을 감안한다면 김자준과 이청의 대립 또한 그저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닌 풍성한 재미를 안겨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창궐]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 원작 웹툰을 읽지 않아 원작에서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 2시간이라는 제한된 러닝타임 때문에 시대적 배경, 캐릭터 구축을 모조리 생략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다. 러닝타임이 부족하다면 야귀떼 장면을 줄이면 된다. 맥락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야귀떼보다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결정적인 순간 등장하는 야귀떼가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후반에는 감동에 집착하는 모양새도 촌스럽다. 박종사(조우진)를 비롯한 몇몇 캐릭터들의 죽음 앞에서 [창궐]은 관객에게 감동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라고 강요하지만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소모품처럼 되어 버린 조연 캐릭터의 죽음은 내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창궐]은 야귀떼의 그 무시무시한 분장 외에는 딱히 칭찬할 것이 없는 아쉬운 영화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