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존 추
주연 : 콘스탄스 우, 헨리 골딩, 양자경

현재까지 2018년 북미 흥행 순위를 보면 당연히 흥행할 줄 알았던 영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블 원작 [블랙 팬서],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 [데드풀 2], [앤트맨과 와스프], [베놈]이 TOP10을 차지하고 있고, [인크레더블 2], [쥬라기 월드 : 폴링 킹덤], [미션 임파서블 : 폴아웃] , [한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와 같은 유명 프랜차이즈 시리즈 영화들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깜짝 흥행작도 있다. 2018년 북미 흥행 9위를 차지한 [콰이어트 플레이스]와 11위를 차지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그 주인공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흥행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북미 관객들의 공포 영화를 향한 사랑은 최근 북미 박스오피스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할로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한 바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흥행은 진정 놀랍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한 영화도 아니고, 북미 관객들에겐 익숙하지 않는 동양 배우에 동양의 가족관이 영화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난 8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북미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을 때 나는 이 영화의 정체가 궁금해 국내 개봉 소식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드디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국내에 개봉했다. 그러나 개봉 첫 주 주말 관객 8만 명을 동원하는데 그치며 6위로 국내 박스오피스에 데뷔했다. 이대로라면 내가 극장으로 달려가기 전 상영이 종료될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기에 나는 혼자서라도 평일 저녁에 극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인 관객들 틈에서 혼자 구석에서 관람한 [크레이지 리치 아이시안]은 북미 흥행을 내게 납득시키기도 했고, 반대로 국내 흥행 부진이 이해되기도 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북미 흥행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사례는 북미에서 2002년에 개봉해 무려 2억4천1백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며 그해 북미 흥행 5위를 차지한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다. 당시에도 내게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흥행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흔한 할리우드 스타급 배우가 단 한 명 나오지 않는 이 영화는 그리스 이민자 출신의 여성과 미국 남성의 사랑과 결혼을 그렸을 뿐이었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은 북미 흥행 성공 덕분에 1년 후인 2003년에 국내 개봉했지만 역시나 조용히 상영을 종료했었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장점은 그리스와 미국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소란스러움이다. 15살 때부터 빨리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생활하던 툴라(니아 발다로스)는 전형적인 미국인 청교도 집안의 이안(존 코벳)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신감을 되찾는다. 그러나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한 툴라 가족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결국 행복한 그리스식 결혼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하며 영화는 끝맺음한다. 아마도 북미 관객들은 툴라 가족의 시끌벅적한 그리스식 가족관에 신선함을 느끼며 영화에 환호했을 것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도 정확히 그러하다. 최연소 뉴욕대 경제학 교수 레이첼 추(콘스탄틴 우)는 남자친구인 닉 영(헨리 골딩)의 절친 결혼식 참가 겸 닉의 가족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닉의 집안은 싱가포르 최대한 재벌이다. 여기에서 [나의 그리스식 웨딩]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접점이 있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 그리스식 인해전술로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영 집안의 어마어마한 재력으로 관객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다.

 

 

사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나의 그리스식 웨딩]도 그렇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도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을 그대로 따라가는 평범한 영화에 불과하다. 특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돈 많은 재벌남과 평범녀의 사랑이라는 '신데렐라'식 러브스토리일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신데렐라'식 러브스토리를 보아 왔던가. 그런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약간 다르다. 이 영화의 갈등 구조는 당사자인 레이첼과 닉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굳건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닉의 어머니인 엘레노어(양자경)가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한다.
수많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를 되짚어보면 남과 여가 티격태격하며 만나고 사랑에 빠지지만, 오해로 인하여 갈등으로 위기를 맞이하다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식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의 가족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보조적인 역할이다. 그런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닉의 어머니 엘리노어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로 따진다면 '신데렐라'와 왕자의 사랑을 왕비가 반대하는 셈인데, 동화에선 존재감 자체가 없는 왕비가 갑자기 주인공이 된 것이다.
재벌남과 평범녀의 사랑을 다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만 보더라도 크리스찬 그레이(제이미 도넌)와 아나스타샤 스틸(다코타 존슨)의 사랑은 가족이 아닌 그들 자신의 선택에 좌우된다. 그것을 당연시하던 북미 관객들에게 애인의 어머니와 갈등을 겪는 레이첼의 이야기가 얼마나 새로웠겠는가? 그러한 새로움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북미 흥행 성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월드의 이야기가 북미 관객들에겐 새로울지 몰라도 국내 관객들에겐 TV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소재에 불과하다. 어쩌면 국내 관객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보며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연하다. 우리나라 TV 드라마 속 시월드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재구성한다면, 엘레노어는 내 아들과 헤어지라며 레이첼에게 돈다발을 던져줘야 한다. 닉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과 결혼하겠다고 우긴다면 엘레노어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면 된다. 조금 더 막장으로 간다면 레이첼의 어머니와 닉의 아버지의 과거 관계가 드러나고, 레이첼의 닉의 배다른 남매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닉이 그 충격으로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억을 잃는다면 화룡점정이다. 이쯤 해야 국내 관객들에겐 "이 막장 드라마 쪼금 재미있네."라고 인정받을 것이다. 
그런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동양식 시월드를 그리면서도 상당히 점잖다. 엘레노어가 레이첼과 닉의 결혼을 막기 위한 한 악행이라고는 레이첼 어머니의 과거 행적을 조사해서 공개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레이첼의 당당한 모습에 레이첼과 닉의 결혼을 쉽게 승낙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국내 관객 입장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시월드는 시월드 측에도 끼지 못하는 미지근함 그 이상일뿐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국내 흥행 성적이 북미와는 달리 미지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TV 드라마의 자극적인 막장에 익숙한 관객에겐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시시한 막장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영화 역시 흔하고 흔한 '신데렐라' 러브스토리일 뿐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비록 자극적인 시월드 막장 드라마는 없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충분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싱가포르에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 속 싱가포르와 실제 싱가포르는 다르겠지만, 현대적이면서 깨끗한 싱가포르의 풍경이 꽤 매력적이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싱가포르 관광 자극 영화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맛깔나는 조연 캐릭터도 좋았다. 특히 레이첼의 친구인 펙린 고(이콰피나)와 그의 가족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웃음을 담당하며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닉의 친척인 아스트리드(젬마 찬)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는 영특함도 보여준다. 실제 영화의 엔딩 크레딧 중간에 남편의 자격지심 때문에 이혼한 아스트리드의 새로운 사랑을 암시하는 쿠키 영상이 숨겨져 있어서 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확실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두 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충분히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이다. 일단 영 가문의 호화찬란한 돈의 힘을 구경하느라 눈이 즐겁고, 펙린 가족 덕분에 웃을 수도 있다. 마지막엔 해피엔딩으로 끝을 내니 극장을 나서면도 행복감에 빠질 수도 있다. 비록 북미 관객들이 느꼈을 신선한 재미는 없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킬링 타임용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