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트리시 시에
주연 : 안나 켄드릭, 레벨 윌슨, 존 리스고

북미 박스오피스의 성공은 곧바로 국내 극장가의 흥행으로 이어지곤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행오버 3부작]이다.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이 포복절도 코미디는 북미에서 1편이 2억7천7백만 달러, 2편이 2억5천4백만 달러, 3편이 1억1천2백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지만, 국내에선 2편만 개봉하여 누적관객 6만 명을 동원한 것이 전부이다.
[피치 퍼펙트 3부작]도 만만치 않다. 북미에서 1편이 6천5백만 달러, 2편이 1억8천4백만 달러, 3편이 1억4백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지만, 국내에서는 1편이 누적관객 1만3천 명, 2편이 7만5천 명, 3편은 아예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행오버], [피치 퍼펙트]를 재미있게 본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피치 퍼펙트]로 인하여 안나 켄드릭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고, 아카펠라의 매력에 흠뻑 빠졌지만, 3부작 모두 극장에서 볼 기회조차 없었다. 상영관이 너무 적었고, 대부분 며칠 상영하다가 간판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급기야 3편은 국내 개봉 소식도 없이 조용히 다운로드 시장으로 직행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나는 [피치 퍼펙트 3부작]이 왜 국내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아야 했는지는 잘 모른다. 스타급 배우의 부재와 아카펠라라는 생소한 소재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는지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게 있어서 그녀들의 아름다운 화음은 언제나 최고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카펠라 소녀들을 1편부터 회상해보겠다. [피치 퍼펙트]는 음악 DJ가 꿈이지만 교수인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에 입학한 베카(안나 켄드릭)의 대학 생활 적응기가 기본 내용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그녀는 친구도 없고, 의욕도 없이 대학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대충 여성 아카펠라 동아리 벨라스에 가입한다. 그런데 벨라스 가입이 베카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베카는 벨라스에서 진정한 친구들과 전국 팝 아카펠라 대회 우승을 위해 함께 노력하며 닫힌 마음을 활짝 열게 된다.
[피치 퍼펙트 3부작] 중 가장 성공한 2편, [피치 퍼펙트 : 언프리티 걸즈]는 배우로 더 유명한 엘리자베스 뱅크스가 메가폰을 잡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다. 이 영화는 대통령 생일파티 축하공연에서 민망스러운 사고로 위상이 땅바닥까지 추락한 벨라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 우승뿐. 하지만 대학 졸업반인 베카는 졸업 후의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피치 퍼펙트 : 언프리티 걸즈]는 대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베카의 불안한 심정을 감미로운 아카펠라로 부드럽게 감싸준다. 

 

 

[피치 퍼펙트 3]는 베카의 직장 생활로 영화를 시작한다. 음악 프로듀서로 원했던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던 베카. 하지만 사회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는 직장에 사직서를 던져버리고, 자신의 비슷한 처지에 빠진 벨라스 졸업생 친구들과 다시 한번 무대에 서기로 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들의 마지막 무대는 군 순회공연이다. 덕분에 [피치 퍼펙트 3]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세계 각지를 무대로 스케일을 키웠다. 하지만 더 이상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있지 않는 벨라스는 무대를 즐기지 못한다. 유일한 대학생 에밀리(헤일리 스테인펠드)만이 선배들에게 무대를 즐기라고 충고하지만, 무한 경쟁 사회를 경험한 베카를 비롯한 선배들은 DJ 칼레드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에 돌입한다.
[피치 퍼펙트 3]는 사회에 나왔어도 대학 생활을 그리워하는 베카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더 이상 풋풋한 아카펠라 소녀가 아님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베카는 친구들과의 아카펠라 공연을 하며 다시 한번 성장하고, 어엿한 음악 프로듀서로 다시 한걸음 나아간다. 

 

 

[피치 퍼펙트 3]는 여기에 또 한 가지 색다른 재미를 추가하는데, 그것은 바로 팻 에이미(레벨 윌슨)의 주연인 베카의 아버지 소동이다. 팻의 어린 시절 그녀에게 상처만 안겨준 범죄자 아버지 퍼거스(존 리스고)는 팻의 통장에 잠들어 있는 거액의 돈을 빼앗기 위해 팻에게 접근하고, 급기야 벨라스 멤버들을 요트로 납치하기까지 한다.
사실 [피치 퍼펙트 3부작]의 주인공은 베카이지만, 팻의 엉뚱한 매력도 큰 인기를 끌었기에 [피치 퍼펙트 3]에서 팻의 아버지 소동을 이끌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게다가 벨라스를 납치하기까지 한 퍼거스 일당이 너무 어리숙해서 [피치 퍼펙트 3]가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분명 [피치 퍼펙트 3]는 1, 2편과 비교해서 실망스럽다. 진정으로 팻의 아버지 소동은 빼버리거나, 아니면 좀 더 치밀하게 넣었어야 했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팻의 비중을 높이기 위한 속 보이는 흥행 전략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카펠라 음악은 좋았다. 팝송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익숙한 노래들을 아카펠라로 들으니 [피치 퍼펙트 3]의 아쉬웠던 부분들이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제 더 이상 아카펠라 소녀들을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엄습했다. 이렇게 나는 아름다운 화음의 아카펠라 소녀들을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