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광식
주연 : 조인성, 남주혁, 박성웅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영화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면에서 2018년 추석 연휴를 겨냥한 사극 영화 [물괴]와 [안시성]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물괴]는 비교적 역사적 자료가 풍부한 조선 중종 당시 벌어진 귈에 나타난 괴수의 기록을 영화화했지만, 영화적 상상력을 필요 이상으로 끌어다 쓰는 바람에 사극이 아닌 판타지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안시성]은 서기 645년 고구려 보장왕 당시 벌어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을 영화화했다. 문제는 당시의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하다는 점이다. 안시성 전투는 20만 당나라 최강 대군을 5천 명에 불과한 안시성 군사들이 무찌른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 일컫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다 보니 거의 신화화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오죽하면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자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것조차 이견이 분분한 상황일까. 
그렇기에 [안시성]은 영화적 상상력에 최대한 기대어야 하는 처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안시성]은 [물괴]와는 달리 최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한 점이 내가 [안시성]은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안시성 전투'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중국 측 자료인 '구당서', '신당서' 등을 자료를 취합하면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대충 정리를 하자면 이러하다.
서기 644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한 것을 구실 삼아 고구려 침공을 결심한다. 서기 645년 4월 1일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여 4월 15일 개모성, 5월 2일 비사성, 5월 17일 요동성, 6월 10일 백암성 등을 빼앗았다. 그리고 6월 20일 안시성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보장왕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 명의 병사를 내주며 안시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군을 가볍게 보고 성급하게 정면 대결을 벌이다가 당군의 포위 공격을 당하고 3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항복하고 만다. 이것이 [안시성]의 첫 장면인 주필산 전투이다.
주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당 태종은 고연수 등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포거(큰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 충거(성벽을 파괴하는 돌격용 수레)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자 60일에 걸쳐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안시성을 공격하려 했지만 토산이 무너지면서 오히려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하고 만다. 당 태종은 토성을 탈환하기 위해 3일간 극렬한 공격을 폈으나 실패했고, 결국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9월 18일 서둘러 퇴각하였다. 

 

위의 내용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 실린 '안시성 전투'의 개요이다. 놀랍게도 영화 [안시성]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물론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각색한 부분도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각 성주들을 소집하였으나 안시성주가 응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양만춘(조인성)과 연개소문(유오성)을 앙숙 관계로 설정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연개소문은 주필산 전투에서 패하자 안시성을 포기하고 평양성 수비에 전력하기로 결심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태학도의 수장 사물(남주혁)을 안시성에 보내는데, 사물의 임무는 양만춘의 암살이다. 사실 당나라의 공격에 고구려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인데, 함께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양만춘을 암살하려는 연개소문의 음모는 조금 무리수가 아닌가 판단되기도 한다.
하지만 양만춘 암살을 목적으로 안시성에 들어온 사물 덕분에 영화의 재미는 더욱 풍성해졌다. 양만춘이 반역자라 생각하는 사물은 연개소문의 명에 따라 양만춘을 죽여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지휘자를 잃은 안시성은 당 태종 이세민(박성웅)에게 무너질 것이 분명하고, 안시성이 무너지면 성민들이 당나라군에 몰살당할 것이 눈에 훤히 보이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한다. 그러한 사물의 캐릭터는 영화적 상상력이 적당하게 발휘된 좋은 예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영화적 상상력이 동원된 부분은 고스란히 [안시성]의 장단점이 된다. 분명 연개소문에 의해 양만춘의 암살 임무를 가슴에 품고 안시성에 보내진 사물은 영화의 긴장감을 높일 수 있는 영화의 장점이 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고연수가 양만춘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고구려 신녀 시미(정은채)가 항복을 권유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시미는 신녀가 되기 전 양만춘과 혼인을 약혼한 사이였으니 양만춘과 시미 사이의 어떤 드라마적 요소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억지 배신만 남긴채 죽음을 당한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영만춘의 여동생이자 백하부대의 대장 백하(김설현)와 기마부대의 대장 파소(엄태구)의 사랑이다. 너무 딱딱한 전투로만 영화를 진행시키는 것이 아쉬워서 느닷없이 파소와 백하의 사랑을 끼워 넣은 듯한 느낌이다. 특히 백하의 마지막 선택은 [안시성]에서 가장 어이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안시성]에서 내가 느낀 아쉬움은 모두 여성 캐릭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남성 캐릭터 위주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동반된 것으로 보이는데, 차라리 남성 캐릭터만으로 자연스럽게 영화를 진행시키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안시성]에 아쉬움을 느낀 것은 딱 시미와 백하 부분이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안시성]은 2시간 15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내게 재미를 안겨준 영화이다. 포거와 충거 그리고 공성탑을 고스란히 재현한 부분도 놀라웠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토산 장면은 압도적이라 할만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토산이 갑자기 무너졌다는 부분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를 우대(성동일)가 이끄는 안시성 내 광부들이 토산 밑으로 땅굴을 파서 무너뜨린 것으로 설정했다. 굉장히 그럴듯한 영화적 상상력이다. 사실 토산이 갑자기 무너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양만춘이 고구려 신궁으로 이세민의 한쪽 눈을 맞췄다는 부분과 연개소문이 사물의 간절한 청에 마음을 돌려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는 부분 등 영화의 마무리는 조금 작위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전체적으로 [안시성]이 끝난 후 [물괴]와는 달리 굉장히 잘 만든 사극 영화라는 느낌을 받으며 극장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