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이스] - 겉과 속이 다른 연쇄 살인마에 대한 기괴한 경고
감독 : 마르얀 사트라피
주연 : 라이언 레이놀즈, 안나 캔드릭, 젬마 아터튼
연쇄 살인마를 소재로 한 영화는 굉장히 많다. 공포 스릴러 영화에서 연쇄 살인마는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줄 최고의 소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연쇄 살인마를 쫓는, 혹은 쫓기는 경찰, FBI, 혹은 일반인들이고, 정작 연쇄 살인마는 후반까지 모습을 감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체를 드러내고는 했다.
물론 연쇄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 메리 해론 감독의 [아메리칸 싸이코]는 뉴욕 월스트리트 중심가 금융사의 CEO 패트릭 베이크만(크리스찬 베일)의 살인 행각을 통해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 영화이다. 프랑스 칼포운 감독의 [매니악 : 슬픈 살인의 기록]도 있다.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을 보이는 외로운 마네킹 복원가 프랭크(일라이저 우드)가 주인공인데, [아메리칸 싸이코]만큼의 평가는 얻지 못했지만 일라이저 우드의 연기 변신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지난 8월에 개봉한 [더 보이스]도 [어메리칸 싸이코], [매니악 : 슬픈 살인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연쇄 살인마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하지만 [더 보이스]는 이들 영화와 많이 다르다. 연쇄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의 대부분이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는 것과는 달리 [더 보이스]는 밝은 코미디풍으로 영화를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더 보이스]의 주인공은 제리(라이언 레이놀즈)라는 남성이다. 그는 겉보기에는 핸섬하면서도 순수한 매력남이다. 하지만 속 사정은 다르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학대로 어린 시절은 불우했고, 게다가 현재는 어머니와 비슷한 정신병 증상을 앓고 있다. 정기적으로 워렌(재키 위버) 박사와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상황이 호전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워렌 박사가 처방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며, 집에서 키우는 개, 고양이와 대화를 하는 상황이다.
만약 제리의 삶이 이대로 계속되었다면 별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워렌 박사가 처방한 약을 복용할 경우 그는 과거의 악몽과 외톨이에 불과한 자신의 상황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약을 거부했기에 낙천적이고, 순수한 매력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회사 동료인 피오나(젬마 아터튼)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더 보이스]가 연쇄 살인마를 소재로 한 다른 스릴러 영화와는 달리 밝은 분위기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약을 복용하지 않은 제리가 바라본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연한(?) 사고로 피오나를 죽이고, 그녀의 머리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엽기 행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마저도 화사하다. 영화에서 딱 한 번 우중충한 공포 분위기를 풍긴 적이 있는데, 피오나를 죽인 제리가 워렌 박사가 처방한 약을 복용한 이후이다. 결국 제리는 약을 모두 버림으로써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진다.
솔직히 나는 가벼운 코미디로 기분전환하자는 생각으로 [더 보이스]를 선택했다. 하지만 제리가 피오나를 죽이는 장면에서부터 그러한 내 기대감은 무너져버렸다. 분명 영화의 분위기는 코미디이고, 화면은 화사하지만 영화를 보는 나는 공포에 휩싸여야 했다. 마치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천진난만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느끼게 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더 보이스]에서 느낀 것이다.
내가 [더 보이스]를 선택한 이유는 출연 배우진에 대한 기대도 한몫했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물론이고, 젬마 아터튼과 안나 켄드릭 조합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특히 나는 안나 켄드릭을 좋아한다. [인 디 에어], [피치 퍼펙트]에서 보여줬던 그녀의 상큼한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 명단에 오르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리사(안나 켄드릭)가 피오나에 이은 두 번째 희생자가 되었을 땐, 당장 영화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만약 제리가 치밀한 계획하에 살인을 벌이는 연쇄 살인마라면 직장 동료를 연달아 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오나의 경우는 운 좋게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리사를 죽이는 것은 "내가 범인이오."라고 스스로 밝히는 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어머니가 죽은 어린 시절에 멈춰 있고, 그렇기에 사리분별이 안된다. [더 보이스]는 제리의 끔찍한 살인과 그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통해 이렇게 독특한 영화로 완성됐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얀 사트라피가 [더 보이스]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영화가 흥행을 염두에 둔 영화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 보이스]가 흥행을 위한 독특한 분위기의 코믹 스릴러 영화였다면 제리의 살인 행각이 이토록 끔찍해서는 안된다.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더 보이스]는 그러한 선을 멀찌감치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더 보이스]가 우리 주변에서 평범한 일반인으로 위장한 채 살고 있는 범죄자들의 위협을 이야기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가끔 뉴스를 보다 보면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길거리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를 외모를 가진 사람이 끔찍한 살인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섬뜩해진다. 영화 속 연쇄 살인마는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해 괴상한 외모를 하고 있지만, 현실 속 연쇄 살인마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다.
제리가 더욱 섬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외모 만으로는 그의 잔인한 내면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순진하고 낙천적이며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우리 이웃일 수도 있고, 회사 동료일 수도 있으며, 내 가족일 수도 있다. [더 보이스]는 그러한 현실을 독특한 코믹 스릴러로 그린 영화가 아닐까?
만약 워렌 박사가 좀 더 일찍 제리의 위험을 눈치챘으면 어땠을까? 제리는 분명 워렌 박사와의 상담 치료에서 약을 복용하지 않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때 워렌 박사가 규정대로 당국에 이를 신고했다면 제리에 의한 희생자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워렌 박사는 제리의 고백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냥 약을 복용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구두 경고로 넘겨 버린다. 그녀의 안일한 대처가 제리를 방치한 셈이 된 것이다.
경찰이 제리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집을 습격했을 때도 워렌 박사는 제리를 죽이지 말라며 그는 환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때 경찰의 한 마디가 속 시원하다. '우선순위는 저희의 안전입니다. 선생님.' 범인의 인권을 먼저 챙기기 전에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도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더 보이스]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독특함을 잃지 않는다. 제리가 예수와 만나고 피해자들과 해피 송을 부르는 장면은 기괴하다 못해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에서 불쌍한 것은 제리가 아닌, 그의 망상으로 인하여 살해당한 피해자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피오나, 리사, 앨리슨이 제리를 한 대 쳤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했던 내 속이 조금이나마 뚫릴 수 있었텐데, 아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