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괴] - 이 영화의 치명적인 실수 두 가지.
감독 : 허종호
주연 : 김명민, 김인권, 이혜리, 최우식
조선왕조실록은 그동안 우리나라 사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처음엔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오백 년>처럼 실록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한 정통 사극 형식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한 드라마가 유행을 하기 시작했는데, 한류드라마 <대장금>이 대표적이다. <대장금>은 중종이 총애하는 의녀의 짤막한 기록을 토대로 궁녀 서장금(이영애)이 의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력을 동원해 54부작으로 담아낸 대하사극이다.
실록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빈칸을 채우는 방식은 2012년에 개봉해서 1,232만 관객을 동원한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도 차용되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 8년에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라는 기록과 이후 광해군의 15일간의 행적이 영원히 사라진 점을 착안하여 조선시대 <왕자와 거지> 우화를 만들어냈다.
올해 추석 시즌 빅 4로 일컬어지는 [물괴]도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시킨 영화이다. 중종 6년 기록을 보면 괴수가 궁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쫓았으나 서쪽 담을 타고 넘어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괴수의 형상에 대해서는 삽살개같이 생기고 크기는 망아지 같으며, 대단히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정체불명의 괴수 기록은 중종 22년, 종중 25년에도 기록되었고, 심지어 중종 27년에는 괴수가 궁궐에서 날뛰기까지 했다고 한다. [물괴]는 이를 토대로 조선시대 괴수 영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완성해냈다.
하지만 [물괴]는 개봉한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온갖 악평에 시달리고 있다. <대장금>의 한류 대표 드라마가 되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천만 영화가 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된 [물괴]의 처지가 참 처량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물괴]는 과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는 나는 [물괴]가 킬링타임용 오락영화치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기왕 돈 내고 보는 영화인만큼 단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찾아내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내게 영화를 보기 전에 쏟아지던 네티즌의 온갖 악평이 오히려 기대치를 낮춰놓아 [물괴]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로 나는 [물괴]와 비교되고 있는 [7광구]도 나름 재미있게 봤다. 물론 [7광구]에서 손발이 오글거리는 장면은 나 역시 참기 어려웠지만, [7광구] 역시 개봉 후 한참 후에 봤기에 기대치를 땅밑까지 낮춰놓은 것이 주효했다.
여하튼... [물괴]를 나름 재미있게 관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단점을 찾으라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영화 자체는 참 허술했다. 그중에서 [물괴]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두 개만 추려 보려 한다. 당연히 내 개인적인 견해이며, 글 중에 영화의 결말이 언급되어 있음을 알리는 바이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만만하게 볼 작업이 아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창작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기로 결정된 만큼 '실제로 저랬을지도 모른다.'라는 인식을 관객에게 심어줘야 한다. 하지만 [물괴]는 전혀 그러지 못하다. 궁에 괴수가 나타났다는 기록 하나만으로 영화의 스케일을 너무 키운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다.
[물괴]의 소재는 궁에 나타난 괴수의 기록과 중종 22년에 발생한 '작서의 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작서의 변'을 설명하자면,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가 세자를 저주하고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쥐를 잡아다가 입, 눈, 귀를 불로 지셔서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폐서인이 되었고, 이후 사약이 내려져 사사되었다. 하지만 '작서의 변'은 당시 귀양지에 있던 김안로가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벌인 일로 밝혀져 경빈 박씨와 복성군의 신원은 사후에 회복되었다고 한다.
괴수의 기록과 '작서의 변'을 토대로 하고 있는 [물괴]는 영의정 심운(이경영)이 중종(박휘순)을 죽여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려 했다는 음모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작서의 변'에서 경빈 박씨편의 유력한 대신이었던 좌의성 심정이 사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심운은 심정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은 대책 없이 스케일만 키운 꼴이 되었다. '작서의 변'과 심운의 쿠데타는 전혀 닮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런 큰 사건이 발생했다면 실록에 기록이 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상상력을 요구하는 빈칸에 '실제로 저랬을지도 모른다.'라고 관객 스스로 인정하게끔 해야 하는데, 심운의 쿠데타는 '저랬을 리가 없잖아?'라는 헛웃음만 터져 나오게 만든다.
[물괴]가 만약 '작서의 변'을 효과적으로 영화의 소재로 쓰려 했다면 정치 드라마로써 영화를 좀 더 복잡하게 구성했어야 했다.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이 어찌 간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물괴]에서 왕실 캐릭터는 중종 하나뿐이고, 반정 캐릭터는 심운 하나뿐이다. '작서의 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경빈 박씨, 복성군은 영화에서 애초에 나오지도 않고,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겠다는 심운의 계획은 너무 단순해서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허종호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가미시킨 영화를 너무 우습게 봤다. 실록에 나오지도 않는 심운의 쿠데타를 억지로 끼워 넣고, '중종 22년에 그랬을지도 모른다.'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를 믿을 관객이 누가 있겠는가? 차라리 [물괴]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영화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 창작 조선 괴수물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영화의 허술한 구성과 빈약한 캐릭터 설정은 여전히 관객의 불평을 샀을 테지만...
분명 [물괴]는 심운의 쿠데타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차라리 궁에 나타난 괴수에 초점을 맞췄어야만 했다. 주요 캐릭터 구성만 보더라도 윤겸(김명민), 성한(김인권), 윤명(이혜리), 허선전관(최우식)은 괴수를 잡기 위해 구성된 맞춤식 캐릭터들이다. 그들이 아무리 일당백의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쿠데타를 꿈꾸는 심운과 그의 군사조직에 맞서 싸우는 것은 역부족이다.
이렇게 윤겸 일행이 수적 우세를 점한 심운의 쿠데타 음모를 막을 수 없으니 부득이하게 '물괴'를 궁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심운의 군사조직은 '물괴'가 처리하고, '물괴'는 윤겸 일행이 처리하는 어처구니없는 부조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구성인 셈이다. 조선의 민심을 흩트리기 위해 가짜 괴수 소문을 만들어낸 심운 앞에 나타난 진짜 괴수 '물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설정인지는 굳이 긴 말이 필요 없을 지경이다.
[물괴]의 첫 번째 실수는 바로 이것이다. 궁에 나타난 괴수 소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케일을 키우겠다며 억지로 소환된 '작서의 변'. 그리고 '작서의 변'과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심운이 쿠데타가 어쩌면 꽤 괜찮을 수도 있었던 조선시대 괴수 영화의 재미를 망가뜨려 버렸다.
[물괴]의 두 번째 실수를 이야기하기 앞서 걸그룹 '걸스데이' 출신 여배우 이혜리의 연기력은 논외로 치자. 물론 나도 안다. 그녀의 연기력이 이 영화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통통 튀는 복고풍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깜짝 놀랄 연기를 펼쳤던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사극 연기는 힘에 부쳐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안시성]의 김설현도 심하게 걱정된다.) 그저 혜리의 아저씨 팬으로서 그녀가 다음 영화에서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연기력이 향상될 것이라 믿어본다.
[물괴]의 두 번째 실수는 바로 윤겸의 죽음과 부활이다. 내가 [물괴]에 대해서 다른 것들은 전부 너그러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도 심운의 쿠데타와 윤겸의 부활만큼은 쉴드를 쳐줄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주인공의 운명은 영화 결말의 중요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관객의 감정이입 대상인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의 결말을 안겨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감동과 극적 효과를 위해 주인공을 죽이는 경우도 많은데, [물괴]는 주인공의 죽음을 선택하는 듯했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짠' 하며 살아나는 윤겸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왠지 감독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인공의 무리한 부활은 그러한 배신감을 안겨준 적이 많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감동적 분위기를 조성했다가 주인공을 살려내며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피해야 할 욕심이다. 그런데 [물괴]는 겁 없이 결말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로 인하여 감동도, 기쁨도 아닌, 배신감만 안겨줬으니 결국 [물괴]의 실패는 스케일에 대한 욕심, 마지막 장면의 감동에 대한 욕심에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물괴]를 킬링타임용 오락영화로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영화를 즐길 수만 있다면 제법 그럴듯하게 구현된 '물괴'의 CG와 조선의 궁이 피바다가 되는 드문 광경, 그리고 15세 관람가라는 사실에 어울리지 않는 사지 절단된 시체들의 모습까지... [물괴]는 조선시대 괴수 영화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애쓴 부분이 구석구석 보인다.
특히 나는 '물괴'의 정체를 폐주 연산군이 전 세계 각지에서 모아 놓은 기괴한 동물에서 근원을 찾고, 어린 초롱이(물괴의 어렸을 적 이름)가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먹어 괴수가 되었다는 설정이 좋았다. [물괴]가 심운의 쿠데타라는 무리한 설정을 포기하고 초롱이가 무시무시한 괴수가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좀 더 단단하게 구현했다면 영화에 대한 내 만족도가 훨씬 높아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괴] 개봉 전 나는 추석영화 빅 4 중에서 [물괴]를 가장 많이 기대했다. [안시성]은 조금 무거워 보였고, [명당]은 [안시성]과 반대로 너무 가벼워 보였으며, [협상]은 너무 뻔해 보였다. 그와는 달리 [물괴]는 독특한 소재에 볼거리도 갖추고 있을 듯하여 기대했지만, 영화의 과한 욕심이 영화 자체를 망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10월에는 조선시대 좀비의 습격을 다룬 [창궐]이 개봉한다고 하는데, [창궐]은 부디 [물괴]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