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윤종빈
주연 :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1999년부터였을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반공영화가 아니라면 금기시되었던 북한 소재의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강제규 감독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첫 시작을 알린 [쉬리]와 장진 감독의 코미디 [간첩 리철진]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1999년에 개봉했다. 1998년 2월, 김영삼 정부가 물러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후 북한 소재 영화들은 심심치 않게 제작되었는데, 특히 2017년에는 [공조], [강철비], [브이아이피]가 연달아 개봉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공작]의 개봉을 앞두고 "또?"라는 한숨이 나올만하다. 하지만 장담컨대 [공작]은 지금까지의 북한 소재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기존의 북한 소재 영화들은 대부분 액션 스릴러 장르였다. 할리우드 영화를 방불케하는 추격전은 기본이고, 제이슨 본을 연상시키는 북한 특수요원의 시원시원한 액션은 필수 요소였다.
오죽했으면 북한 소재 한국 영화의 특징이  잘 생기고 싸움 잘하는 북한 요원과 그저 아저씨 같은 남한 요원이라는 '북미남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을까? 실제 [의형제], [은밀하게 위대하게], [베를린], [동창생], [용의자], [공조] 등이 '북미남아' 법칙을 따랐다. 이는 그만큼 북한 소재의 영화가 어느새 흥행의 법칙이 세워졌을 정도로 흔해졌음을 뜻한다.
하지만 [공작]은 '북미남아' 법칙을 따르지 않을뿐더러, 추격전도, 액션씬도 없다. 다시 말해 북한 소재 영화에서 오락영화적인 요소들이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무려 137분이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작]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리얼리티가 있기 때문이다. 

 

 

[공작]은 이른바 '흑곰성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네이버 시사 상식 사전에 의하면 '흑곰성 사건'은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북풍 공작 중 하나이다. 당시 안기부는 (주)아자커뮤니케이션에 위장취업한 박채서를 통해 대북사업과 관련한 공작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흑곰성 사건'의 박채서는 [공작]의 박석영(황정민)이다. 정보사 소령 출신인 그는 1993년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자 안기부에 스카우트되어 대북사업가로 신분을 위장한 채 베이징 주재 북한 고위 간부 리명운(이성민)에게 접근한다.
기본적으로 [공작]은 첩보 스릴러 영화이다. 하지만 첩보 스릴러 영화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007 제임스 본드'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박석영은 리명운의 신임을 얻고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들며 북핵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박석영에게 있어서 임무 완수는 다른 첩보 스릴러 영화처럼 극한 액션과 첨단 장비가 아닌, 그저 시간과의 전쟁일 뿐이다.  

 

박석영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1993년 시작된 그의 임무는 1997년이 되어서야 서서히 무르익는다. 박석영은 북한의 김정일(기주봉) 위원장과 만나 남북 광고사업을 체결하기까지 한다. 이제 광고를 찍는다는 명분 아래 북한 땅에서 북핵 관련 정보를 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대선을 며칠 앞두고 야당인 김대중 후보가 지지율에서 여당인 이회창 후보를 앞서 나가자 여당과 안기부는 북한과의 은밀한 거래를 시도한다. 북한이 한반도를 도발하고, 그로 인하여 국민들에게 안보 불안을 느끼게 함으로써 여당인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게끔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박석영은 갈등에 휩싸인다. 그는 애국심 하나도 이 위험천만한 첩보 세계에 몸을 던졌다. 북한 핵 개발을 파헤치고 막는 것이 조국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여당과 안기부는 권력 지키기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박석영에게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막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라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들에게 애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공작]에는 두 가지 종류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박석영과 리명운이다. 그들은 남과 북이라는 대치되는 편에 서있으면서도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박석영은 북한 핵 개발을 막아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리명운은 박석영과의 대북사업을 성공으로 이끎으로써 북한의 경제난을 해소하려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캐릭터는 안기부 해외 실장 최학성(조진웅)과 북한의 보위부 요원 정무택(주지훈)이다. 그들의 애국은 사심이 섞여 있다. 자신의 사심을 위해서라면 남과 북이 어찌 되던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북한 도발을 돈으로 사고팔며 이익을 챙기려 든다.
2017년 12월에 개봉한 [강철비]에는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 최학성과 정무택이 정확히 그런 자들이다. 한반도의 평화, 남북통일에는 관심조차 없는... 

 

물론 [공작]의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아무도 모른다. [공작]은 순 제작비 165억원, 총제작비 190억원이 들어간 블록버스터인 만큼 다큐멘터리로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각색된 부분도 많을 것이며, 영화의 내용 자체가 박채서의 기억에 의존한 만큼 박석영과 리명운 캐릭터를 미화한 부분도 많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원래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에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다고 느낀 것은 비단 북한 거리를 실감 나게 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 핵 개발과 안기부의 북풍 공작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남북 광고사업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는 코끝이 찡하기도 했다. 그 순간 박석영이 리명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차장님에게 조국이 하나이듯 저에게도 조국은 하나입니다." 그깟 이념이 무엇이길래 같은 조국을 가진 우리는 이렇게 서로 분단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단 말인가? 

 

영화가 끝나고 한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흑금성 사건'의 실제 인물인 박채서의 운명이다. 그는 2010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6년형을 받고 2016년 만기 출소했다고 한다. 2010년은 진보정권이 물러나고 보수정권인 이명박 대통령 시절이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국민의 권리인 선거를 잘 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윤종빈 감독은 2005년 저예산 독립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로 호평을 받으며 데뷔한 후, 2008년 상업영화 데뷔작 [비스티 보이즈]에서 혹평을 받았다. 다시 2012년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흥행 성공으로 이끌더니, 2014년 [군도 : 민란의 시대]는 기대보다 흥행 성적이 부진했다. 하지만 [공작]을 통해 한국형 첩보 스릴러의 새로운 장을 이끌어 냈으니, 그도 은근히 퐁당퐁당 감독인가 보다. 그렇다면 윤종빈 감독의 다음 영화는 걸러야 하나?
뭐 윤종빈 감독의 다음 영화를 걸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차후의 일이고, 확실한 것은 [공작]이야말로 요 근래 만들어진 북한 소재 영화 중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영화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