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섹시 중년들이 맞닥뜨린 중년의 위기...[굿 보스], [어나더 라운드]
최근 나는 내가 갱년기가 아닌지 의심이 들곤 한다. 그냥 하루 종일 무기력하고, 모든 것이 귀찮고, 갑자기 온몸에 열이 올라오기도 하고, 오후 5시가 되면 배고픔이 밀려오면서 어지럽기까지 하다. 아내한테 말했더니 발끈 화를 내며 자기가 먼저 갱년기 시작했으니 나는 자기 갱년기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부부가 동시에 갱년기이면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다면서... 예전에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요즘은 영화 보는 것도 귀찮다. 영화라는 특효약도 들지 않는다니, 사춘기도 영화로 넘겼는데, 갱년기는 사춘기보다 심한가 보다. 이런 귀차니즘을 겨우 이겨내고 최근에 본 두 편의 유럽 영화 [굿 보스], [어나더 라운드]는 나처럼 갱년기에 접어든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어떻게 중년의 위기를 이겨냈을까?
[굿 보스] - 그에게 남은 것은 부질없는 명예욕 뿐이었다.
감독 :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주연 : 하비에르 바르뎀
창업주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페인 최고의 저울 회사인 '블랑코 스케일즈'를 이끌고 있는 블랑코(하비에르 바르뎀)는 우수기업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벽장을 가득 채운 트로피 개수를 하나 더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직원들이 도움은커녕 문제만 일으킨다. 생산팀 매니저 미랄레스(마놀로 솔로)는 바람난 부인 때문에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며 어이없는 실수만 연발하고, 회계팀에서 해고당한 호세(오스카 델 라 푸엔테)는 회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기분 전환 겸 잠시 데리고 놀 생각이었던 홍보팀 인턴사원 릴리아나(알무데나 아모르)는 알고 보니 가족 간 친분이 있는 지인의 딸이었다. 이 모든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고 우수기업상을 수상하기 위해 블랑코는 오늘도 동분서주한다.
무려 하비에르 바르뎀 주연의 블랙 코미디 영화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면 2007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 안톤 시거를 연기하여 제80회 미국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이다. 이후에도 그는 선 굵은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 [007 스카이폴], [캐리비안의 해적 : 죽은 자는 말이 없다]에서 강력한 빌런을 연기하기도 했으며, 최근작인 [듄]에서도 프레멘의 수장 스틸거를 연기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을 발산했다. 하지만 [굿 보스]에서는 기존과는 180도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정말 하비에르 바르뎀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솔직히 블랑코는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직원들의 개인사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좋은 사장 즉 '굿 보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는 우수기업상 수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직원과 직원의 가족을 이용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포르투나와 그의 아들 칼리드이다. 영화 초반 칼리드는 인종 혐오 범죄를 저질러 경찰에 체포된다. 그러자 포르투나는 블랑코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블랑코는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칼리드를 경찰서에서 빼낸다. 칼리드를 자신의 부인 아델라의 가게에 일을 하도록 배려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국엔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호세를 처리하기 위해 칼리드를 이용한다.
미랄레스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미랄레스의 부인 회사까지 찾아가서 우수기업상을 탈 때까지 문제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하다가 귀싸대기를 맞기도 한다. 결국 블랑코는 미랄레스를 해고하고, 미랄레스의 부인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직원을 생산팀 매니저 자리에 앉히며 문제를 해결한다. 릴리아나 문제 처리도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하다. 릴리아나가 지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녀를 회사에서 내쫓으려 하고, 릴리아나가 순순히 물러나려 하지 않자 아예 그녀를 홍보팀 팀장으로 임명하여 입막음해버린다. 영화를 보며 블랑코의 모든 죄가 드러나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다.
블랑코 악행의 클라이맥스는 블랑코에게 사주를 받아 호세를 폭행하던 칼리드의 죽음이다. 포르투나는 칼리드가 호세를 폭행한 것이 블랑코의 사주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블랑코는 칼리드의 장례식장에서 앞으로 출시될 새 저울의 이름에 칼리드라는 이름을 붙여 영원히 칼리드를 기억하겠다는 뻔뻔한 추모사를 남긴다. 칼리드를 추모하며 블랑코의 얼굴에서 미묘한 미소가 보인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칼리드의 죽음 덕분에 호세라는 골칫거리가 완벽하게 처리했으니 블랑코가 슬픔 속에 기쁨은 숨길 이유는 충분하다.
결국 블랑코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수기업상을 수상하며 벽장에 트로피 하나를 추가한다. 벽장을 장식한 트로피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 블랑코. 아델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는 블랑코에게 남은 것은 그저 금속 덩어리에 불과한 몇 십 개의 트로피가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트로피가 블랑코의 인생을 대변해 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블랑코의 거짓된 인생의 증거가 될 뿐이다. 그런 트로피를 보며 뿌듯해하는 블랑코의 모습은 그저 부질없어 보일 따름이다.
[굿 보스]는 시종일관 경쾌한 분위기로 영화가 진행된다. 우수기업상을 수상하기 위해 골칫거리 직원들 문제를 해결하려는 오지라퍼 블랑코의 모습은 박장대소는 아니더라도 씁쓸한 웃음 정도는 안겨준다. 이 영화의 장르가 블랙 코미디인 이유이다. 그런 씁쓸한 웃음 뒤에 영화는 영화는 어느 뻔뻔한 자본가의 위선을 까발린다. 아무리 돈이면 뭐든지 다 되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돈이 인생의 성공 척도가 아니듯이, 트로피는 블랑코의 잘난 인생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블랑코는 드디어 본격적인 중년의 위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어나더 라운드] - 술이 중년 위기의 절대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감독 : 토마스 빈터베르그
주연 : 매즈 미켈슨
코펜하겐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이자 친구 사이인 마르틴(매즈 미켈슨), 톰뮈(토마스 보 라센),페테르(라스 란데), 니콜라이(마그누스 밀랑)는 중년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마르틴의 마흔 번째 생일날 흥미로운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혈중 알코올 농도 0.05%로 유지하면 그 사람은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노르웨이의 학자 핀 스콜데루드 세운 가설을 증명해 보는 것.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하고, 수업에 대한 열정도 사라진 마르틴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대로 활력을 되찾으며 예전처럼 활기찬 자기 자신을 느낀다. 문제는 점점 술에 중독되면서 일상생활에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술에 취한 톰뮈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들의 실험은 중단되고 마는데...
최근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에서 사생활 문제로 하차한 조니 뎁에 이어 그린델왈드를 연기한 덴마크의 국민 배우 매즈 미켈슨이 주연을 맡은 [어나더 라운드]는 술에 대한 영화이다. 때마침 요즘 TV 광고에서 '칼스버그 맥주'를 홍보하는 매즈 미켈슨 덕분에 '칼스버그 맥주'구매욕이 샘솟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어나더 라운드]는 더더욱 내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솔직히 나는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한다. 주량이 기껏 소주 1, 2병, 맥주 4, 5병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술이 좋다. 적당하게만 술을 마신다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은 나에게도 솔깃했다. 문재는 과연 어떻게 더도, 덜도 말고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느냐는 것. 매번 알코올 농도 측정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술을 마실 때마다 측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혈중 알코올 농도 0.03% 이상인 상태에서 운전을 하면 음주 운전으로 걸린다고 하니,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을 실험하고 싶다면 절대로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영화의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마틴과 그의 친구들의 실험은 성공적인 듯 보였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한 그들은 평소와는 달리 활기찬 모습으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확실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은 맞는 것일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바로 술의 중독성이다. 정말 가설 그대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만 딱 맞출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처음엔 자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제심은 무너진다. 속된 말로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 술이 나를 마시는 순간이 언젠가는 오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이고 나발이고, 모든 것은 끝장 난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장나는 캐릭터가 바로 톰뮈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내가 있거나, 동료 교사와 썸을 타고 있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톰뮈은 혼자 살고 있는 독신남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친구들은 술에 중독이 되지 않게끔 잔소리를 하고, 눈치를 주는 가족, 연인이 있었지만, 톰뮈는 그들과 비교해서 자유로웠고, 그러한 그의 자유로움은 그들의 실험에서 치명적인 함정인 알코올 중독에 톰뮈를 빠지게 만든다. 그렇게 톰뮈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비극을 맞이한다.
결국 그들의 실험은 톰뮈의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난다. 비록 핀 스콜데루드의 가설을 증명하겠다는 엉뚱한 실험은 비극적으로 끝이 나지만 실험이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마르틴은 아내와의 이혼 위기를 맞이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재결합을 암시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르틴의 변화가 술 덕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르틴과 그의 아내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재결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함이다. 마르틴과 그의 아내가 서로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장면이 재결합으로 이어진 것이니까.
뭐야... 그러면 술은 톰뮈의 죽음 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거야? 절대 그렇지 않다. 사실 술을 마시면 솔직해진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술의 힘을 빌려 하곤 한다. 나도 아내한테 그랬었다. 가끔 술에 의한 솔직함은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마르틴의 경우처럼 반대로 인간관계를 회복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술의 순기능임과 동시에 악기능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술이 아니다. 우리의 자제력이다. 술을 적당히 마신다면 마르틴처럼 중년의 위기를 벗을 수도 있고, 적당히 마시지 못한다면 톰뮈처럼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 술은 죄가 없다. 자제하지 못한 사람이 문제일 뿐이다. 아, 이 영화를 보고 나니 퇴근 후 '칼스버그 맥주' 한잔하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