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이건, 여자이건 중요하지 않다. 꿈을 향한 열정만 있다면... [걸], [아이 엠 우먼]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 그것은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모든 국가에서 내세우는 공통된 가치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힘이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 등이 우리를 보이지 않는 차별에 가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성별도 마찬가지이다. 넌 남자라서 안돼... 넌 여자라서 안돼...라는 선입견은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이번에 본 두 편의 영화는 그러한 성별의 벽을 깨부수고 결국 꿈을 이루어낸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다.
[걸] - 소년과 소녀의 경계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다.
감독 : 루카스 돈트
주연 : 빅터 폴스터, 아리 보르탈테르
16세 소녀 라라(빅터 폴스터)는 발레리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발레 학교에 입학한다.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너무 늦게 발레를 시작한 라라는 친구들을 따라잡기 위해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한다. 고된 발레 연습으로 힘이 들지만 라라의 꿈을 응원하는 아버지 마티아스(아리 보르탈테르)와 어린 남동생은 그녀에게 큰 힘이 되어 준다. 하지만 라라를 진짜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호르몬 치료이다. 사실 그녀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가 되고 싶었던 트랜스젠더였던 것.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성전환 수술 날짜를 기다리던 라라는 하루라도 빨리 여자가 되어 발레리나의 꿈을 이루고 싶지만 의사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순차적인 치료를 고집한다. 결국 라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걸]은 보기 전, 트랜스젠더 발레리나의 이야기라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루카스 돈트 감독은 세계적인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노라 몽세쿠흐의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것. 그렇기 때문에 나는 [걸]을 보기 전에 대충의 내용을 유추했었다. 일단 라라가 성전환 수술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고 호르몬 치료를 하며 발레 학교에 입학하지만 그녀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퇴학 위기에까지 몰린다. 라라는 그 모든 편견과 홀로 싸우며 결국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인정을 받는다. 내가 예상한 영화의 내용은 뭐 대충 이런 식의 전개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걸]은 그런 식상한 전개를 취하지 않는다. 라라의 가족들은 라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발레 학교도 라라가 트랜스젠더라는 것을 알면서도 발레리나에 대한 그녀의 열정만으로 입학을 허가한다. 라라의 학교 친구들도 그녀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표하지 않는다. 물론 영화 후반부에 합숙 장면에서 라라의 학교 친구들이 너도 우리의 성기를 봤으니 우리에게도 너의 성기를 보여달라며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라라가 겪어야만 했던 사회적 폭력의 수위에 비한다면 약한 편이다.
어쩌면 독일이라는 나라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전개가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성전환 수술을 한 군인이 결국 불명예 제대를 해야 했던 사건이 불과 몇 개월 전에 버젓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어쩌면 내가 [걸]을 보고 라라가 겪어야 했던 사회적 폭력의 수위가 약하다고 느낀 것도 나 역시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걸]은 자극적인 소재와는 달리 굉장히 잔잔한 영화처럼 느껴졌다.
예상과는 달리 라라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편견에 홀로 싸워야 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자신과의 싸움을 해내가야만 한다. 이웃집 남자아이에게 관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어서 오럴섹스만 한 후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면은 그녀의 흔들리는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그녀의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남성의 육체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전환 수술을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발레를 하기 위해서는 체중 관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라라는 과도한 다이어트로 인하여 결국 쓰러지고 만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녀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완전한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발레리나라는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 하지만 그녀는 여자도, 발레리나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라라의 이야기와 노라 몽세쿠흐의 경험담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개의 꿈을 동시에 쫓기 위해서라면 그만큼 간절해야 했던 것이다. 조금은 편안하게 [걸]을 보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설마... 설마... 그러지 마...'라며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꿈을 이루기 위한 그녀의 독한 선택. 바로 그것이 [걸]이 지니고 있는 꿈을 향한 열정이다.
[아이 엠 우먼] - 그녀는 어떻게 7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이 되었는가?
감독 : 문은주
주연 : 틸다 코브햄-허비, 다니엘 맥도널드, 에반 피터스
1966년 가수의 꿈을 안고 어린 딸과 함께 미국 땅을 밟은 헬렌 레디(틸다 코브햄-허비). 그러나 비틀스를 비롯한 남성 가수들이 장악한 팝 시장에서 헬렌은 제대로 된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칼럼니스트 릴리언 록슨(다니엘 맥도널드) 뿐. 먹고살기 위해 보잘것없는 밤무대를 전전하던 헬렌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제프 월드(에반 피터스)와 사랑에 빠진 것. 음반 업계에 잔뼈가 굵은 제프는 헬렌을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둘은 결혼 후 LA로 무대를 옮긴다. LA에서 제프의 노력으로 드디어 기회를 잡은 헬렌은 곧바로 유명 가수의 반열에 오르고, 1972년 발표한 'I AM WOMAN'이라는 곡을 통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고 호주 출신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여성 팝 보컬상을 수상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릴리언의 죽음이라는 충격과 마약에 빠진 제프로 인하여 재정상태가 엉망이 되자 헬렌은 가수로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려 하는데...
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아이 엠 우먼]은 흔한 전기 영화처럼 보일 뿐이다. 그녀가 올리비아 뉴튼존, 앤 머레이와 함께 세계 3대 여자 가수이며, 그녀의 대표곡 'I AM WOMAN'은 70년대 여성들의 애국가로 불리었고, 여성해방운동의 주제곡과도 같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내겐 '그래?' 정도의 시큰둥한 반응을 이끌어낼 뿐이었다. 결국 내가 [아이 엠 우먼]에 관심을 가진 것은 호주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문은주라는 한국 이름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기 때문이다. 한국 출신 호주 감독인 문은주라는 여성 감독이 만들어낸 호주 출신 유명 여가수의 전기 영화는 어떨까? 이것이 [아이 엠 우먼]에 대한 나의 궁금증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이 엠 우먼]은 굉장히 무난한 영화였다. 솔직히 다른 전기 영화와 비교해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지도 않았다. 1시간 56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그냥 무덤덤하게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음악 영화답게 노래는 좋았다. 하지만 내가 워낙 팝에 관심이 없다 보니 귀에 익숙한 노래가 나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감흥이 떨어지더라.
그래도 헬렌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로 헬렌이 처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연출은 꽤 인상적이었다. 영화 초반 음반사에서 거부당한 헬렌이 밤무대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무조건 따르겠다는 순종적인 내용이다. '그를 따르리. 그가 가는 곳 어디라도 그를 따르리. 바다가 아무리 깊어도 산이 아무리 높아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내 사랑을 따르리. 그가 가는 곳 어디라도 그를 따르리.' 헬렌과 제프의 사랑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헬렌은 오직 사랑만 바란다는 지고지순한 노래를 부른다. '그건 나도 확실히 알아요. 남자들은 말했죠. 장난감이 되어 주면 세상을 주겠다고. 내가 가진 건 당신을 감싸 안을 두 팔과 사랑뿐. 시간도 파괴할 수 없죠. 그 대가로 뭘 요구할지 알고 싶나요?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내가 바라는 건 아주 작은 것.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앞으로 더 사랑하겠다고. 그게 다예요.'
하지만 유명 가수가 되고, 드디어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게 되자 그녀의 대표곡인 'I AM WOMAN'를 세상에 내놓는다. '나는 여자. 나의 포효를 들으라. 무시하기에는 우린 너무 커졌지. 모르는 척 살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게 됐어. 거짓말에 속고 속으며 무시당하며 살아온 세월.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어. 이제 지혜를 얻었네. 지혜는 고통의 산물. 큰 대가를 치렀지만 엄청난 것을 얻었네.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강해. 나는 꺾이지 않아. 나는 여자.'
헬렌이 바란 것은 그저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여자라는 굴레로 가두려 했다. 열심히 노래만 부르면 될 줄 알았는데, 그녀가 이루었던 모든 것은 제프에 의해 물거품이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자신의 노래가 여성해방운동의 주제곡이 된 것이다. 어쩌면 당시 여자들도 헬렌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을 여자라는 굴레로 가두려 하지 말고, 남자들과 차별이 없는 권리를 누리는 것. 가수로써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자 했던 헬렌과 차별에 시달리던 여자의 공통된 바람이 'I AM WOMAN'을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