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린 그들이 최종 승자가 되기까지... [팡파레] VS [그링고]
아마도 내 인생을 영화로 만든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다. 액션,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 그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저 굴곡 없이 잔잔하게만 스토리가 진행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나도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다. 누가, 언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 만약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건에 휘말린다면 나는 아마도 희생자가 되기에 딱 알맞을 것이다.
바로 여기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늦은 밤 바에 들렸다가 금고를 노리고 침입한 2인조 강도를 만난 [팡파레]의 제이(임화명)도,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멕시코에 출장을 갔다가 마약 조직과 얽히게 된 [그링고]의 해럴드(데이빗 오예로워)도, 분명 자신이 그런 끔찍한 사건에 휘말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제이와 해럴드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팡파레] -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감독 : 이돈구
주연 : 임화영, 박종환, 남연우
핼러윈 파티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유흥가에 위치한 작은 바. 영업을 마친 그곳에 제이가 불쑥 들어온다. 바의 사장(김기정)은 2층 청소하는 동안 시간이 걸리니 그때까지 바에 있더도 된다고 배려를 한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배려라기보다는 제이를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에 불과하지만, 제이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도 없는 바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문제는 사장이 2층을 청소하는 동안 두 남자가 잠긴 문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하면서부터이다. 문을 열어주면 안 되는데, 마음 약한 제이는 문을 열어주고, 순간 두 남자는 강도로 변해 제이를 기절 시키고, 사장을 살해한다.
사건이 여기에서 마무리되면 그나마 나을 텐데, 바의 금고를 털려다가 살인까지 저지른 강태(남연우)와 희태(박종환)는 시체 처리를 위해 조직폭력배인 쎈(이승원)을 부르고, 쎈은 전문 시체 처리업자인 백구(박세준)를 부르며 현장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급기야 강태가 총에 맞아 죽고, 희태가 총을 들고 폭주를 하는 동안 제이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볼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혼란의 바에서 형성된 생태계에서 가장 최하위 존재인 줄 알았던 제이는 사실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최상위 존재였던 것. 그렇게 제이는 희태, 쎈, 백구를 모두 죽이고 바를 나선다. 참 재미있게 잘 놀았다는 표정으로...
솔직히 제이는 나와 같은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다. 물론 겉보기에는 연약한 여자에 불과하고, 희태와 쎈은 그녀를 술집 여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영화는 초반 도입부를 통해 그녀가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은근슬쩍 내비친다. (가발을 썼다고 하지만 도입부 차에서 통화하던 여자와 제이가 같은 여자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눈치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이가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당황하고 무서워해야 하지만 제이는 그저 시크하게 이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팡파레]의 실책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돈구 감독의 연출 의도는 약해 보이는 제이라는 캐릭터가 강한 남자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부각시킬 때 관객이 느끼는 쾌감이다. 그렇다면 좀 더 세밀하게 제이의 정체를 감췄어야 했다. 그런데 이돈구 감독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제이에게 뭔가 한방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계속해서 관객에게 건넨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나는 제이의 활약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 제이는 그저 묵묵히 인질의 역할에 충실한다. 때론 가짜 눈물까지 흐르며 희태에게 묵숨을 구걸하기까지 한다.
제이가 기대했던 활약을 펼치는 것은 고작 10여 분 정도이다. 영화의 대부분을 인질로 굴욕을 당한 제이가 그 굴욕에 복수를 하는 시간이 고작 10여 분이라니...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이돈구 감독은 작은 바를 무대로 하여 연약해 보이는 한 여자와 거친 네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약자와 강자를 전복시키는 영화적 쾌감을 관객에게 선사하려 하지만 글쎄, 신인급 감독의 한계 때문인지 그 의도가 최소한 내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저 제이의 활약이 너무 짧아 아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분명 제이는 이 난장판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국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침착함이다. 총을 손에 쥐면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던 희태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불안감과 강태의 죽음으로 침착함을 잃고 폭주하는 반면, 제이는 침착하게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의 불안을 이용해서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은 제이의 경우가 아닐까? 물론 제이처럼 기본적인 킬러 본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겠지만...
[그링고] - 착하고 정직하게 살면 언젠가 나를 위한 기적이 찾아 오지 않을까?
감독 : 내쉬 에저튼
주연 : 데이빗 오예로워, 샤를리즈 테른, 조엘 에저튼, 아만다 사이프리드, 샬토 코플리
평범한 인생을 살아오던 제약회사 영업사원 해럴드는 친구이자 사장인 리처드(조엘 에저튼), 공동 대표인 일레인(샤를리즈 테른)과 함께 떠난 멕시코 출장 길에 회사가 곧 매각될 것이며 자신은 정리해고 1순위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게다가 아내인 보니(탠디 뉴튼)가 리처드와 바람을 피우며 해럴드에게 이혼을 요구까지 하기에 이른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해럴드는 살 길을 찾고자 자신이 멕시코에서 납치되었다고 거짓으로 리처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해럴드의 계획은 회사에서 가입한 납치 보험금 5백만 달러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 그런데 문제는 회사의 비용 절감을 위해 리처드가 보험을 해지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멕시코 공장의 금고에 보관된 마약 제조법을 빼앗기 위해 멕시코 마약 조직은 금고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해럴드를 찾아 나섰고, 리처드는 전직 특수 요원인 형 미치(샬토 코플리)에게 해럴드를 죽이라고 의뢰한다. 해럴드가 출장 중 사망하면 회사에서 받게 될 거액의 보험금을 노린 것이다. 예기치 않게 목숨이 위태로워진 해럴드. 그저 착하게 살면 될 줄 알았는데 하늘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하늘도 그를 버리지는 않았으니 착하게 살면 언젠가는 복을 받는다고 했던가. 헤럴드는 모든 위기를 벗어나 거액의 돈까지 손에 거머쥐고 흔적을 감춘다.
'우와! 이 캐스팅 라인 실화냐?' [그링고]라는 생소한 영화의 정보를 접한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로 이름을 알린 후 최근에는 [클로버필드 패러독스], [돈렛고]에서 활약한 데이빗 오예로워는 조금 낯선 배우이긴 하지만 그 외에 샤를리즈 테른, 조엘 에저튼, 아만다 사이프리드, 샬토 코플리, 탠디 뉴튼은 할리우드의 A급 배우들이다. 어떻게 이러한 캐스팅이 가능했던 것일까? 아마도 내쉬 에저튼 감독이 조엘 에저튼의 형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내쉬 에저튼은 스턴트맨 출신으로 수많은 영화에서 배우로도 활약을 했는데 그러면서 배우들과 든든한 친분을 쌓았나 보다. A급 배우들이 영화 속 비중에 상관없이 [그링고]에 출연을 한 것을 보면...
[그링고]는 해럴드라는 평범한 사람이 멕시코에서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해럴드의 주변에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들만 득실거린다. 친구이자 사장인 리처드는 착한 해럴드를 이용만 하고, 일레인은 해럴드를 업신여긴다. 보니는 리처드와 바람을 피우고, 미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이티의 빈민을 돕기 위한 돈을 구한다는 핑계로 해럴드를 죽이려 한다. 그나마 정상적인 것은 마약을 밀매하려는 남자 친구에게 속아 멕시코로 여행을 온 서니(아만다 사이프리드) 뿐이다. 해럴드는 서니에게 하소연을 한다. 착하고 정직하게만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왜 세상은 나쁜 놈들만 잘 살고 나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고난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상당히 공감이 되긴 했다.
그래도 하늘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만약 정상적이라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비틀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죽이는 잔인한 멕시코의 마약 조직 보스는 물론, 전직 특수 요원 미치까지 그를 죽이려 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서로 해럴드를 죽이려고 하는 덕분(?)에 해럴드는 살아남았고, 끝에 가서 최종 승자가 된다. 이쯤 되면 영화니까 가능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배우들 보는 맛에 꽤 즐거운 영화라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선생님은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면 너무 착하고 정직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유혹에 흔들린다. 하지만 말이다. 해럴드처럼 언젠가는 복을 받게 되지 않을까? 이건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맞는 말이다. 그래도 가끔 기적이라는 것은 있다. 그리고 그 기적만큼은 착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라 아직은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