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당신이 참 보고 싶은 날이네요] 1편. 서른둘에 찾아온 사랑
서른둘에 찾아온 사랑
내 사랑 내 남편 기호 씨를 만난 건 그 사람이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반이었을 때였다. 그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마침 내 친구가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친구는 그와 내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소개팅을 권했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둘, 결혼이 많이 늦어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잔소리를 매일 지겹게 듣는 중이었다. 친구는 그 사람에게 나를 학창 시절 문학소녀로 책도 많이 보고 글을 잘 썼다고 소개했고, 나에게는 그 사람이 서울서 대학원까지 나와 다시 한의대에 다니고 있는 능력 많은 남자인데 두 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우린 시내 카페에서 처음 만났는데, 잘생긴 그의 외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짙은 눈썹에 긴 속눈썹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말투가 약간 무뚝뚝하긴 했지만, 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담배를 피던 그 사람은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너는 주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글을 쓰냐?” 하고 물었다. 늦은 인연이 운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순천 동천 다리를 가운데에 두고 각자의 집이 있었기에 우리는 주로 산책 데이트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그의 원래 꿈은 일등 항해사가 되어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것이었지만, 외할아버지가 살아생전에 한약국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그쪽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다시 한의대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한의대에 다니면서부터는 약초나 침에 대해 따로 배우러 다녀 그는 항시 바빴다. 그는 직업과 취미 그리고 삶의 목표에 관한 생각도 명확했다.
“인간은 사회적, 경제적 동물이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아.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건 취미로, 잘하는 것은 직업으로 삼으면 좋지 않겠어? 돈도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저 취미라고 하기엔 아까울 만큼 그 사람은 잘하는 게 너무 많았다. 여러 분야에 능숙했던 그는 소위 말하는 ‘금손’이었다. 그렇게 그의 매력을 하나둘 발견해 가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하나씩 추억을 쌓아가던 어느 날, 그는 책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나 고백 아닌 고백을 하며 우리 동네에 우리만의 아지트를 구했다고 했다.
“난 원래 공부하면 여자 생각 안 하는 놈인데, 책을 펼치면 네가 보이고, 담배 연기 속에서도 네가 보였어.”
난 사랑을 쉽게 믿지 않는 여자였고, 나이 서른둘에 이렇게 사랑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그래서 그와의 만남은 정말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가까운 이조차 알지 못하는 내 깊은 감성을 알아봐 준 사람이었고,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며 마음으로 고백해준 처음이자 영원한 사랑이었다.
우린 동외동 도롯가에 있는 작은 건물에 세를 얻어 일단 한의원을 열기로 했다. 그는 일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몇몇 친구들과 함께 밤낮으로 병원 단장에 매달렸고, 1994년 11월 27일부터 정식 개원을 했다. 도롯가라고 해도 그 당시엔 지나다니는 차량이나 사람이 드물었다. 일종의 모험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만만했다.
개원하고 몇 달이 지난 후 결혼식을 올렸다. 난 형식적인 건 필요 없다고 사양했었지만, 그와 시부모님의 배려로 가까운 산장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95년 2월 13일 결혼식을 마친 후 곧바로 시댁에 들어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에 두려움이 앞섰지만, 그 사람만 옆에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친해진 두 아이는 나를 친엄마로 여기며 잘 따랐고, 아버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자하신 분이었다. 귀부인 같은 매력을 지닌 어머님은 조금 차가운 말투에 냉정한 면도 있었지만,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었을 뿐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잘 대해주셨다.
한의원을 열고 한동안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 다른 한의원에서는 추나요법이나 이체침술 진료를 하는 일이 흔치 않았기에 우리 한의원은 서서히 유명해졌다. 한의원을 연 초창기에 그는 부잣집 큰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누구에게나 호불호가 있는 법이라면서 우리 보리 밥 굶기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역학 공부도 했던 그 사람은 ‘명희’라는 내 본명을 싫어했다. 한자로 밝을 명(明)과 기쁠 희(喜)였던 내 이름이 사주와 잘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태어난 해의 띠와 날까지 따지면 곁에 있는 사람을 빛내주거나 나 스스로 빛날 수 있는 사주라면서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절에서도 몇 개월 공부했던 그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 ‘보리’였고, 깨달음과 지혜란 뜻을 담고 있었다. 술 마시고 들어온 날에는 어김없이 ‘보리’. 또는 ‘명바라(명희만 바라본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결혼 3년 차가 되어갈 때쯤 막내아들이 태어났고 남편은 한의원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후 새롭게 병원을 열고나서는 남편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바쁘게 일했다. 절친 고 원장과 함께 그룹 스터디를 하고, 개원 시 함께 세미나를 열었던 여러 원장님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자료를 공유하고 밤샘 토론을 하면서 좋은 한의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편의 인생철학은 늘 한결같았다. 의사는 결코 장사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의사가 신은 아니지만, 환자를 치료함으로써 삶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는 있다고 생각해. 한의사에게 필요한 건 상술이 아니야. 오로지 환자를 잘 낫게 하는 실력이 필요할 뿐이지.”
그의 뜨거운 신념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