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딥워터]를 봤었다. 스웨덴 영화인 [딥워터]는 솔직히 영화적 재미만 따진다면 실망스러운 영화였지만 그래도 북유럽의 차가운 감성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지금까지 홍콩, 일본, 마카오가 전부였던 나는 영화를 보며 유럽 여행을 따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론 코로나19 시대에 유럽 여행이라니 당치도 않고, 또 그럴만한 돈도, 시간도 없지만 상상하는 데엔 돈이 들지 않으니... 그리고 이번 기회에 유럽 영화 몇 편 골라봤다. 비록 유럽 여행은 갈 수 없지만 이들 영화를 통해 유럽 감성이라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며...

​

​

​

​

​

​

[브릿마리 여기 있다] - 아무리 보잘것없는 나이지만 '내가 여기 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

​

감독 : 튜바 노보트니

주연 : 페닐라 어거스트

​

​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스웨덴의 소설가 프레드릭 베크만을 좋아한다. 특히 아내는 <오베라는 남자>를 시작으로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브릿마리 여기 있다>, <베어타운> 등 그의 소설을 사서 집으로 가져왔고, 그러한 아내 덕분에 나 역시도 억지로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들을 읽어야만 했다. 솔직히 나는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착하고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베어타운>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지난 주말 [브릿마리 여기 있다]라는 영화를 보기로 한 것 역시 아내를 위해서였다. 프레드릭 베크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인데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못한 나로서는 영화에 대한 기대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고, 아들도 엄마편을 들으니 다수결에 원칙에 따라 내가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상했던 대로 영화가 실망스러웠다.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집안일만 40년을 해온 베테랑 가정주부 브릿마리(페닐라 어거스트)가 어느 날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고, 집을 나와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40년 전 웨이트리스를 한 것 외에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브릿마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 직업소개소에서 브릿마리에게 보르그라는 작은 마을의 청소년 센터 관리인 자리를 제안한다. 얼마 안 있으면 폐관을 하고,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브릿마리가 아이들의 축구 코치까지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브릿마리로써는 찬 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덥석 보르그 청소년 센터 관리인 자리를 수락한 브릿마리. 하지만 보르그에서 브릿마리의 일상은 순탄하지가 않다.

브릿마리라는 캐릭터는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타고난 결벽증과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사실 그녀에겐 어린 시절 아픔이 있다. 차 사고로 언니가 죽고 부모가 실의에 빠지자 브릿마리는 언니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열심히 가사를 도왔다. 하지만 결코 그녀의 어머니는 결코 그녀를 칭찬하지 않았고, 그렇게 브릿마리는 존재감이 없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의 뒷바라지가 그녀의 인생 전부이다. 어느 순간 그녀는 없었다. 소설과 영화의 제목인 '브릿마리 여기 있다'라는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브릿마리의 작은 외침이다.

문제는 영화가 브릿마리의 캐릭터를 거의 생략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 브릿마리와 직업소개소 직원의 신경전이다. 이 부분에서 브릿마리의 엉뚱함과 원칙적인 모습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브릿마리를 돋보이게 할 이 장면이 거의 생략되었다. 그러다 보니 브릿마리는 그저 가사일 밖에 할 줄 모르는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런 그녀가 보르그의 아이들을 위해 축구를 배우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과정에 별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영화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주르륵 흝어 지나가는 느낌이다. 하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자주 하는 실수인데, [브릿마리 여기 있다]는 그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이다.

나는 원작 소설도 재미있게 읽지 못했다. 브릿마리가 직업소개소 직원과 신경전을 펼치는 부분만 재미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아예 그 부분이 생략되었으니 내가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경제 위기로 몰락해가는 보르그의 차가운 풍경은 인상적이다. 희망이 없기에 축구에 집착하는 아이들. 이기는 것이 아닌 한 골만이라도 넣는 것이 목표인 그곳에서 브릿마리가 찾은 희망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내가 여기 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영화 마지막 장면, 그토록 가고 싶었던 파리에서 한가로운 여행을 즐기는 브릿마리의 모습은 그래서 희망적이었다.

​

​

​

​

​

​

[트랜짓] - 최악의 상황에서 그를 찾아온 행운, 그리고 그 행운이 저주가 되기까지...

​

​

감독 : 크리스티안 펫졸드

주연 : 프란츠 로고스키, 폴라 비어

​

​

내가 [트랜짓]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네이버 영화에 등록된 이 영화의 장르가 드라마, SF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파리로 진군하자 마르세유로 탈출한 한 남자의 여정에 대한 시대극인데, 장르가 SF라니... 당연히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래서 이 영화가 왜 SF냐고?'라는 의문만이 내 입가에 맴돌았다. 한 가지 SF다운 설정을 꼽으라면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영화에서 군인들이 현대식 무기를 들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가 SF라고 우기면 안 된다.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포털 사이트인데, 네이버도 참 오류가 너무 많다. 나는 혹시 마지막에 파리를 점령한 것이 독일군이 아닌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며 끝까지 네이버를 믿고 영화에 집중했단 말이다.

[트랜짓]이 SF가 아니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굉장히 흥미로운 영화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은 파리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피해 마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의 여정이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멕시코로 떠나려 하지만 단순한 전자제품 수리공에 불과한 게오르그에겐 그러한 기회조차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그를 찾아와 바이델이라는 작가에게 두 통의 편지를 전해주라는 부탁을 한다. 편지를 전해주면 마르세유에 가는 차에 태워주겠다는 친구의 말에 게오르그는 바이델이 묵고 있는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바이델은 이미 자살한 후였고, 게오르그가 호텔에 간 사이 친구는 경찰에 체포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게오르그에게 계속 기회가 생긴다. 부상당한 한 남자를 마르세유에 있는 집에 데려다주라는 친구의 부탁으로 열차에 몰래 올라탄 게오르그. 하지만 그 남자는 이미 사망했고, 게오르그만 무사히 마르세유에 몸을 숨긴다. 그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한 일이 생긴다. 멕시코 대사관에서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착각하여 미국을 경유하여 멕시코로 가는 비자를 발급한 것이다. 이제 게오르그는 프랑스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멕시코에서 바이델이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려 한다.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타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하지만 게오르그는 바이델의 아내 마리(폴라 비어)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혼란에 빠진다. 과연 그녀와 멕시코에 가도 될까? 그녀가 자신이 바이델의 신분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비난하지 않을까? 결국 게오르그는 마리만 배에 태우고 자신은 마르세유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때 또 한 번의 행운이 일어난다.

영화는 아주 조용히 게오르그의 일상을 쫓아간다. 사실 그는 운이 굉장히 좋았다. 파리에서 친구가 바이델에게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식당에서 체포된 것은 친구가 아닌 게오르그였을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부상당한 한 남자를 마르세유에 데려다주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 남자는 마르세유에 도착도 하기 전에 죽고, 게오르그만 무사히 파리를 탈출한다. 그 이후에도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게오르그에겐 계속 기회가 생긴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 바이델의 신분을 갖게 되고, 멕시코에 갈 수 있는 비자를 취득한다. 모두가 원했던 바로 그것을... 하지만 그것은 과연 행운일 뿐일까?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

독일군이 언제 마르세유를 점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르세유의 사람들의 얼굴엔 절망만이 가득하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미국, 멕시코로 떠나는 것. 멕시코와 미국 대사관에 줄을 선 사람들의 표정엔 절망과 희망이 묘하게 교차하고 있다. 그런데 멕시코 비자를 차지한 게오르그는 주저한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멕시코행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게오르그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은 게오르그에게 평생의 상처와 아픔만 남긴다. 마지막 마리의 비극을 전해 들은 게오르그의 표정은 공허하기만 하다. 이제 그는 독일군을 피하지 않고 절대 돌아올 수 없는 마리를 평생 기다릴 뿐이다.

참 묘한 분위기의 영화였다. 영화의 분위기는 암울하면서도 신비롭다. 행운이라면 행운이고, 저주라면 저주인 게오르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쫓다 보면 어느 한순간 나 역시도 기분이 멍해진다. 어떻게 이럴 수가... 과연 게오르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속에 좌절해야 할까? 게오르그의 선택은 그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공허하다. 어쩌면 이러한 묘한 분위기가 내가 쉽게 접하지 못한 유럽 영화의 특징이 아닐까?

​

​

​

​

​

​

​

[작가 미상] - 예술로 승화한 그의 우아한 복수

​

​

감독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주연 : 톰 쉴링, 폴라 비어, 세바스티안 코치

​

​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 9분이다. 일반 영화 두 편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작가 미상]이라는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이 어마어마한 영화의 러닝타임에 먼저 주눅이 들어야 했다. 게다가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2차 세계대전 소재의 영화이며, 예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도 나에겐 만만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작가 미상]을 보기로 한 이유는 이 영화를 향한 극찬에 가까운 평가 때문이다. 가끔은 가벼운 상업 영화보다는 이렇게 묵직한 예술 영화도 보고 싶은 법이다.

그러나 막상 [작가 미상]을 보기 시작하자 나는 금방 영화에 푹 빠지고 말았다. 3시간 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이니만큼 하루에 조금씩 마치 미니시리즈를 보듯이 쪼개서 볼 생각이었는데 자칫 하루 만에 [작가 미상]을 전부 볼 뻔했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대로 다 봤을지도... 그만큼 [작가 미상]은 흡입력이 상당하다. 특별한 내용은 없는데 쿠르트의 인생을 쫓다 보면 언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3시간 9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2차 세계대전의 독일. 쿠르트(톰 쉴링)의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이모 엘리자베스(사스키아 로젠달)는 약간의 조울증이 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끌려갔고, 결국 우생학에 사로잡힌 독일 나치의 의사 칼 시반트(세바스티안 코치)에 의해 가스실로 보내진다.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 그의 식구들은 모두 나치 당원이 되었지만 독일이 패전을 하면서 삼촌들은 전사하고, 아버지는 나치 당원이라는 이유로 교직에서 쫓겨나 막노동을 하다가 자살한다. 전쟁 후 소련군이 점령한 동독에서 뛰어난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은 쿠르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을 그리며 명성을 쌓아 간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만 존재하는 동독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던 쿠르트는 아내 엘리(폴라 비어)와 함께 서독으로의 탈출을 감행하는데...

이렇게 대강의 줄거리만 놓고 보면 [작가 미상]은 쿠르트가 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에서 예술가로 성장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영화는 칼 시반트에 대한 쿠르트의 복수극이기도 하다. 칼 시반트는 독일의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우생학에 발맞춰 정신병이나 장애가 있는 여성 환자들의 불임 수술을 주도하고 급기야 그들을 죽이기 위한 명단을 적성하는데 앞장선다. 쿠르트의 이모 엘리자베스도 그렇게 죽었다.

문제는 하필 쿠르트가 사랑에 빠진 것이 칼 시반트의 딸 엘리라는 점이다. 쿠르트가 엘리와 사랑에 빠진 후에도 칼 시반트의 악행은 멈추지 않는데 자신의 딸이 열등한 쿠르트의 아기를 갖게 할 수 없다며 임신한 엘리의 낙태 수술을 주도한 것이다. 쿠르트와 엘리가 서독으로 탈출한 후에도 칼 시반트는 신분을 감춘 채 호의호식하며 쿠르트를 무시하는데, 이에 대한 쿠르트의 복수는 예술에 의한 것이다. 사진을 모사한 쿠르트의 그림은 칼 시반트에 의해 죽은 이모 엘리자베트와 칼 시반트 그리고 이미 체포된 그의 나치 공범들에 대한 그림이다. 그 그림을 본 순간 두려움에 떠는 칼 시반트의 모습. 그것이 칼 시반트에 대한 쿠르트의 예술적 복수이다.

그림이 전시되던 날, 기자들은 쿠르트의 그림이 담은 의미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쿠르트는 그저 '작가 미상'의 사진을 모사했을 뿐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로또 번호 같다. 아무 의미 없는 6개의 숫자가 로또 당첨 번호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 숫자들은 의미를 갖게 된다. 쿠르트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쿠르트는 이 그림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그림을 보는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도록 기다릴 뿐이다. 누군가는 이 그림에 과거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이 그림에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진실한 건 모두 아름다운 법이니까. 마지막 장면, 우아한 복수와 함께 예술적 성취를 이룬 쿠르트의 모습은 진실하기에 아름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