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젊었을 때 모르던 것들
내가 젊었을 때 모르던 것들
(로이 클락 Roy Clark)
중학생 때, 영어 과외선생님이 몇 분 계셨다. 내 가정 형편을 생각해선지 과외비를 받지 않은 고마운 분들이다. 근데 그분들은 나를 모른다. 팝송으로 영어를 가르쳐 준 클리프 리처드와 클렌 캠벨, 그리고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때 Yesterday, when I was young>를 부른 로이 클락이다. 그땐 어려서 그 노래가 뭘 얘기하는 건지 잘 몰랐다. 이런 소절이 있다.
눈부신 것들만 찾던 내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 있었지.
입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집에 가면 마주해야 할 고통이 있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누워계셨다. 왼쪽 팔다리 마비증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고등학교는 전기, 후기로 나뉘어 학교별 입시를 치렀다. 전기 학교에 떨어진 나는 후기 학교에 들어갔다. 입시에서 실패한 아이들의 교실은 어두웠다. 게다가 집안 분위기도 암울해서 나는 다른 탈출구를 찾았다.
탈출구는 영어 동아리에 다니기. 여러 학교 애들이 모여 있던 동아리는 규모가 제법 컸다. 나는 어쩌다 회장까지 하게 됐고, 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영문학의 밤’을 치르기도 했다. 동아리에는 멘토들이 있었다. 근데 그들 중에 ‘후원’을 자신의 사익을 위한 ‘과시하기’로 삼는 상류층 어른이 있었다. 그는 학생의 집안 환경에 따라 차별하는 속내도 드러냈다. 나는 그걸 참지 못하고 회장 임기도 끝나기 전에 동아리에서 나와 버렸다.
어느 학교나 그러지 않았을까. 영화 「친구」에는 교사가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하며 학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다. 그렇게 괴팍하거나 위선적인 선생이 우리 학교에도 있었다. 동아리에서 후원자를 자처한 그 사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런 게 공부를 게을리 할 핑곗거리가 될 순 없었는데 아무튼 내 반항기가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대학 전기시험에서도 그때 표현으로 미역국을 먹은 건 당연했다.
어쨌든 1975년 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숫자나 공식 같은 게 싫어서 문과를 택했는데 대학 가서 맞닥뜨린 경제 수학 강의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의식도 개념도 없어 보이는 학생이었다. 당시는 긴급조치 철폐 시위가 한창일 때다. 최루탄 맞고 눈물 흘린 적이 있긴 해도, 시위 현장에 있었던 기억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비싼 학비를 내면서 공부는 안 하고, 그렇다고 데모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연애도 잘 안 되는 청춘이었다.
어느새 나는 그렇게 휘청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나, 앞날이 참 갑갑해 보였다. 어떤 계기였을까. 나는 경제학과 과목 중에서 유독 ‘경제사’만을 좋아했다. 숫자 같은 게 안 나와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민중을 착취한 지배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의 변천사. 그런 걸 공부하던 경제사는 지금도 그렇지만 ‘좌익’의 딱지가 붙기 쉬운 기피 학문이었다. 나는 경제사 시험에서 전 학기, 전 과목을 통틀어 유일한 A+ 학점을 받았다.
그 무렵 하층민의 삶을 다룬 소설, 이를테면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해일의 《갈 수 없는 나라》를 탐독하기도 했다. 얼마 전, 책장 속에 묻혀있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꺼내봤는데 마지막 페이지, 빈 곳에 내 볼펜 글씨가 적혀있었다.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부를 믿고 기대는 사람보다는, 후천적인 성실함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보상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 1978년 4월 7일 금요일
아주 짧은 독후감이다.
그때다 비로소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다고 봐야 하나.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어린 시절부터 잠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 무슨 얘긴지 잘 몰랐던 <예전에, 내가 젊었을 때> 가사가 이제야 가슴에 와 닿는다.
그때 나는 빨리 달리기만 했어.
청춘도 따라서 달아나 버렸지.
그래도 난 인생이란 도대체 뭔지,
생각하는 걸 멈추진 않았어.
휘청거린 청춘의 흐린 날, 맑은 날을 보내며 나는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의 내가 형성돼 가는 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