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독 : 저스틴 벨도니

주연 : 헤일리 루 리차드슨, 콜 스프로즈

​

​

2019년 막바지에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 지우기.

​

​

2019년이 시작하자마자 개봉작 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를 매주 작성했었다. 그리고 본 영화들을 빨간펜으로 지워 나갔다. 리스트가 작성된 노트 한 장이 빨간색으로 지워진 광경을 보면 괜히 뿌듯해진다. 올해도 참 열심히 영화를 봤다는 생각과 함께...

노트의 첫 번째 장은 지난 11월에 [크리미널 게임 : 보석 사기단]을 보며 완벽하게 지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과 [파이브 피트]를 봄으로써 역시 빨간펜으로 깨끗하게 지워졌다. 2019년 막바지에 이르니 이렇게 2019년에 보고 싶었던 영화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세 번째 장의 남겨진 마지막 영화인 [더 보이]와 네 번째 장의 남겨진 마지막 영화인 [미드소마]를 솔직히 지우지 못할 것 같다. 당시엔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몇 개 사이 내 심장은 더욱 쪼그라들었나 보다.

암튼 다행히도 두 번째 장의 남겨진 두 편의 영화는 첫 번째 장의 남겨진 영화인 [크리미널 게임 : 보석 사기단]처럼 최악은 아니었다. [옷코는 초등학생 사장님!]은 기대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는 갖추고 있었고, [파이브 피트]는 지난 주말 넷플릭스에서 본 하이틴 로맨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갖춘 영화였다.

​

​

​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두 청춘의 사랑

​

​

[파이브 피트]가 다른 하이틴 로맨스 영화와 다른 것은 두 주인공인 스텔라(헤일리 루 리차드슨)와 윌(콜 스프로즈)는 낭포성 섬유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낭포성 섬유증을 네이버 지식백과에 검색해보면 폐와 다른 기관에서 과도한 영의 점액질이 분비되는 것이 특징인 치명적인 질환으로 유전 질환이라고 짧게 설명되어 있다. 뭐 의학적으로 이 낯선 병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는 같은 병을 가진 사람끼리 6피트 이하 접근해서도 접촉해서도 안된다고 설명한다.

키스, 스킨십은 물론 6피트 이하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는 낭포성 섬유증을 앓는 스텔라와 윌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기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외신에 따르면 낭포성 섬유증을 앓는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며 영화에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어찌 되었건 [파이브 피트]는 이 특이한 병을 최루성 하이틴 로맨스로 잘 표현해 냈다.

똑같은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지만 스텔라와 윌은 자신의 병에 대한 대처 방식이 서로 다르다. 스텔라는 병원에서 모범생으로 통할 정도로 치료에 적극적이다. 성격도 활발하고 낙천적이며 자신이 먹어야 할 약들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꼬박꼬박 먹고,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일생을 타인과 공유하기도 한다. 그와는 반대로 윌은 반항적이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받아들였고, 치료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즐길 생각뿐이다.

​

​

​

고작 1피트일 뿐이지만...

​

​

서로 성향이 다른 남녀의 사랑은 로맨스 영화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영화엔 마치 로맨스 영화의 기본 법칙으로 굳어진 두 주인공을 도와주는 착한 동성애자 포(모이세스 아리아스)도 나온다. 뻔해도 너무 뻔하다고 영화의 평점을 팍팍 깎아버려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낭포성 섬유증이라는 병의 존재이다. 스텔라는 윌에게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고, 윌은 그 대가로 스텔라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며 서서히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서로를 만질 수조차 없다. 6피트(약 1미터 83센티미터)가 그들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거리이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은 '파이브 피트'이다. 6피트만이 허용된 그들에게 5피트는 엄청난 모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험을 윌이 아닌 스텔라가 과감하게 선언한다. 고작 1피트일 뿐이지만 그 선언은 낭포성 섬유증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어 사랑으로 향하는 가장 용감한 선택이 된다. "낭포성 섬유증이 많은 걸 뺏어갔으니 이 정도는 다시 뺏어와도 되겠죠? 1피트. 겨우 1피트. 그게 공간이든, 거리든, 길이든 간에 뺏어와야겠어요. 낭포성 섬유증, 넌 이제 도둑이 아니야. 도둑은 이제 나야."

​

​

​

겨우 인생일 뿐이야. 어차피 눈 깜짝할 사이에 죽게 될걸

​

​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환자끼리의 사랑은 어쩌면 자살행위일지도 모른다. 스텔라와 윌을 가족처럼 돌봐주는 간호사 바브(킴벌리 허버트 그레고리)는 이미 서로 사랑을 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낭포성 섬유증 커플을 목격했었다. 그렇기에 스텔라와 윌의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최선임을 알기에...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살기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사랑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병든 삶을 포기해야 할까? 치료에 집착하는 스텔라에게 윌은 "겨우 인생일 뿐이야. 어차피 눈 깜짝할 사이에 죽게 될걸."이라며 충고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엔 스텔라가 윌에게 같은 말을 한다. 그녀는 그만큼 윌과의 사랑이 간절했던 것이다. 삶을 포기해도 될 만큼...

영화를 보는 도중 아내가 퇴근했다. 아내는 "또 하이틴 로맨스 영화야?"라며 내게 핀잔을 준다. 하지만 상관없다. 6피트의 거리를 넘어 위대한 사랑을 하는 스텔라와 윌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어느새 내 눈 가는 촉촉해졌다. 어릴 땐 저렇게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해보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스텔라와 윌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보고 나니 비극이 아닌 지금의 내 사랑이 만족스럽다. 그래도 [파이브 피트]는 사춘기 시절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걸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을 때의 감정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