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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21세기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12  쭈니 2019.07.17 17:00:06
조회 18 댓글 0 신고

감독 : 테리 길리엄

주연 : 아담 드라이버, 조나단 프라이스, 조아나 리베이로

나는 한때 테리 길리엄의 영화들을 탐닉했었다.

최고의 SF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항상 [12 몽키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론 이견은 있을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블레이드 러너] 등 영화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걸작 SF 영화가 수두룩하니까. 하지만 영화적 재미로만 따진다면 내게 있어서 [12 몽키스]는 최고라는 수식어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영화이다. [12 몽키스]에 흠뻑 빠져들었던 나는 테리 길리엄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뒤지기 시작했고, 뒤늦게 테리 길리엄 감독의 대표작 [브라질](국내 개봉명은 [여인의 음모])부터 시작해서 [몬티 파이튼 시리즈]와 [바론의 대모험]까지 며칠간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들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솔직히 테리 길리엄의 초기 영화들은 분명 기이하긴 했지만 내겐 너무나도 낯설었다. 하지만 테리 길리엄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조금은 자본의 원리로 순화시킨 영화들인 [피셔 킹], [그림 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은 재미있었다.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는 구할 수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브라질]보다 [12 몽키스]를 더 좋아하는 다분히 할리우드 키드 다운 내 영화적 취향이 반영된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테리 길리엄 감독의 초기작들을 보며 그의 영화를 즐기는 법을 터득한 것은 큰 성과였다.

2009년에 극장에서 본 나의 마지막 영화인 [파르나서스 박사와 상상극장]은 그러한 성과가 빛을 발한 예이다. 이 영화는 히스 레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히스 레저가 맡았던 토니 역을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파렐이 나눠서 연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9년 12월 국내 개봉 당시 이 화려한 캐스팅 덕분에 주목을 받았지만, 영화 자체는 테리 길리엄 감독의 기이한 상상력이 마구 발휘된 독특한 영화였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들이 '속았다'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테리 길리엄 감독의 초기작으로 단련한 나는 재미있게 영화를 봤었다.

테리 길리엄의 필생의 역작이 완성되었다.

[그림 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의 흥행 실패 이후 테리 길리엄 감독의 할리우드를 떠나 자유롭게 자신의 영화 세계를 완성시켜 나갔다. [타이드랜드], [파르나서스 박스의 상상극장], [제로법칙의 비밀]이 그 시절 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이며, 제71회 칸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그 정점에 있는 영화이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테리 길리엄 감독의 그토록 완성하고 싶어 했던 필생의 역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시작에 앞서 'and now... after more than 25 years in the making... and unmaking... (마침내 완성되다. 오랜 세월 끝에...)'라는 자막이 나온다. 천신만고 끝에 이 영화를 완성시킨 테리 길리엄 감독의 환희에 찬 표정이 저절로 그려지는 듯하다.

테리 길리엄 감독은 25년 전 이미 '돈키호테' 영화화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제작비 마련, 배우들의 스케줄과 촬영장의 날씨까지 테리 길리엄 감독을 괴롭혔고, 결국 '돈키호테' 영화화는 처참하게 엎어졌다. 당시 테리 길리엄 감독이 '돈키호테'를 영화화하기 위해 겪었던 과정은 메이킹필름으로 남겨져 후에 다큐멘터리 영화 [라 만차 Lost In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25년 만에 완성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어떤 영화일까?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때는 천재라 불렸지만 지금은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보드카 광고 촬영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CF 감독 토비(아담 드라이버)는 촬영이 맘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날 뿐이다. 바로 그때 자신의 졸업 작품이자 출세작인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DVD를 우연히 보게 되고 영화 촬영 장소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직접 촬영 장소를 헌팅하고,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배우로 섭외하는 등 모든 것에 열정이 넘쳤던 과거를 떠올리며 머리도 식힐 겸 영화 촬영 장소를 찾아간 토비. 하지만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평범한 구둣방 노인이었지만 토비에 의해 '돈키호테'로 캐스팅된 하비에르(조나단 프라이스)는 영화 촬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이 진짜 '돈키호테'라는 망상에 빠져 있고, 평범한 시골 처녀였지만 스타가 될 수 있다는 토비의 달콤한 꾐에 빠져 둘시네아 공주로 캐스팅된 안젤리카(조아나 리베이로)는 무비 스타의 꿈을 좇아 대도시로 갔다가 창녀로 전락한다. 마을 사람들의 원망을 받으며 마을에서 도망친 토비는 자신을 산초라고 생각하는 하비에르와 만나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기이한 모험을 하게 된다.

얼핏 내용만 놓고 본다면 '돈키호테'를 소재로 한 유쾌한 코미디 영화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는 어느 정도 코미디 영화의 외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할리우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단순히 유쾌한 코미디 영화라는 생각에 가볍게 본다면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를 단순한 판타지 영화로 기대했다가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단순한 코미디 영화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그 속을 뒤집어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풍자가 섞여 있다. 우선 천재 CF 감독인 토비가 그러하다. 다분히 테리 길리엄 감독 스스로의 모습이 투영된 듯한 토비는 과거의 열정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돈만을 쫓는 속물 감독으로 전락했다. 그는 열정이 넘쳤던 젊은 시절의 영화를 우연히 본 후 기이한 모험을 하게 되는데 이 모험을 통해 마지막에 가서는 토비 스스로 하비에르의 뒤를 잇는 '돈키호테'가 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토비는 처음엔 하비에르에게 산초라 불린다. 산초는 '돈키호테'를 수행하는 시종인데, 꿈과 이상을 좇는 '돈키호테'와는 달리 상당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캐릭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비와 산초는 어느 정도 접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비는 하비에르와 함께 기이한 모험을 하며 점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돌시네아 공주를 마법사에게 구하겠다는 '돈키호테'의 망상처럼, 광고주인 알렉세이(조디 몰라)에게서 그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안젤리카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산초였던 토비가 서서히 '돈키호테'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비에르의 죽음 이후 토비는 하비에르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착각하게 되는데, 이때 토비가 산초라고 부르는 것은 돈을 위해 알렉세이의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속물 안젤리카이다. 이제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은 하비에르와 토비에 이어 토비와 안젤리카에 의해 새롭게 다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돈키호테'를 꿈꾼다.

우리는 하비에르를 미쳤다고 비웃었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코미디 영화처럼 느껴졌다면 자신을 '돈키호테'라 생각하는 하비에르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 우스꽝스러운 것은 속물근성을 내비치는 영화 속의 현대인들이다. 아무런 의욕도 없이 광고주가 원하는 거지 같은 CF를 기계적으로 촬영하는 토비, 남자만 보면 껄떡 되며 달려드는 토비의 상사(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아내 재퀴(올가 쿠릴렌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오래된 성에서 호화찬란한 파티를 여는 알렉세이. 자본주의적 시선으로 본다면 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을까?

돈, 사회적 성공에 집착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고 만다. 가끔 그러한 것들을 포기하고 하고 싶었던 것을 도전하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충고를 듣게 된다. 그러한 현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올가미이다.

가끔, 아주 가끔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처럼 돈, 사회적 성공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달려가면 어떨까? 따분했던 구둣방 노인이기를 거부하고 '돈키호테'가 된 하비에르처럼, 열정 없이 기계처럼 CF를 찍던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하비에르의 뒤를 이어 '돈키호테'가 된 토비처럼... 그렇기에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할리우드의 영광을 뒤로하고 다시 마이너한 영화 세계로 돌아온 테리 길리엄 감독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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